정 중 동 (靜中動)
유럽에서 나의 작곡발전상에 관하여 ( Tübingen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수여식에서 한 강연)
- 윤이상
저에게 주어진 이 영광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저의 작품에 주어진 영광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개자의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저의 음악에 대해서 항상 되풀이되어 말하여지는 것은 그것이 동아시아 전통을 서구라파 예술음악의 언어로 개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동아시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의 궁중 음악언어들뿐 만 아니라, 신화적인 소재들 혹은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모든조형 예술의 모티브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70년대 초반기까지 명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조나 융합의 과정이 어떻게 저의 음악 속에 나타나고 있는가 에 대해서는 아직 전연 숙고되어 본 적이 없읍니다. 그리고 또한 두 개의 이토록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문화가 서로 만나는 과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그것이 어디로 이끌어져 갈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모릅니다. 저의 작품으로써 음악의 영역에서 대리되어지고, 그래서 그 흐름이 동양에서부터 서양으로 가게 되는 이 만남의 과정은 분명히 음악 문화적, 사회적인 유례를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례들이란 그들이 상호 이해와 통합을 가져 올 것인지 또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가능하게 된 것인지 우리가 아직 답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이 시간을 저는 저의 거의 30년에 걸친 유럽에서의 작곡 생활을 돌이켜 보고자 하며, 이로써 저의 음악에 대한 이해와 그 속에 깃듯 음악의 동서관계를 이해시키는 기회로 갖고자 합니다.
50년대 말에 저의 첫 작품이 인정받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5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은 현대음악에서 그때까지 계승되어온 쎄리얼 음악의 교조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는 그 어떤 전망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가 1956년에 최신의 작곡법을 배우기 위해서 파리에 왔을 때 저는 Tony Aubin 에게서 작곡교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때 그의 제자들과 함께 Beethoven 과 Wagner 를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이론은 Dukas의 제자인 Pierre Revel 에 사사 받았으며, 여기에서 저는 19세기에 필수적이었던 파리- “consevatoire”의 전통을 배웠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현대작곡가로 알려진 사람들은 Andre Jolivert, Jean Rivier, Henri Sauge, Alexandre Tan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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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Olivier Messiaen 이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그러나 저에게는 낯선 것이었읍니다.
저는 아직 저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으며, 또한 저 자신의 특유한 음악적 언어를 찾기 위해 이들에게 연결지을 만한 그 어떤 자질도 발견하지 못했읍니다.
Berlin 에서 저는 Josef Rufer 에게 신 빈파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Josef Rufer 의 ”12음으로의 작곡” 이란 저서를 저는 일본어출판본으로 읽었던 바 있습니다.
저에게 좋은 스승이었던 분은 또한 Boris Blacher 였습니다. 그는그의 제자들에게 이색적인 것을 설득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 특유의 음악을 찾도록 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1958년에 처음으로 Darmstadt에서 개최된 ”국제하기강습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해는 바로 John Cage 도 처음으로 거기에 참석했던 해입니다. 1957년에 이미 Darmstadt에서 그 유명한 Stock-Hausen 의 “Klavierstück XI”가 초연되었으며 또한 Pierre Boulez는 프로그람적인 강연 “Alea”를 개최하였읍니다. 이로써 Hans Vogt가 정신적인 고향을 잃어버린 전후세대의 “체제에로의 도피”라고 특징지웠던 쎄리엘 주의로부터의 탈피가 명백해 졌읍니다. Cage는 이제 음악작품이라는 개념을 문제에 부쳤을 뿐 아니라, 음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까지도 논란을 일으켰읍니다.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현혹되기도 했읍니다. 왜냐하면 한 작곡가가 이 당시에 내릴 수있는 결단이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개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작품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보장하는 음악적 제 재료의 완전한 결정론과, 또 다른 한편 “원칙으로서의 우연” 속에서 최상의 자유를 찾는 비결정론의 대립으로 빚어지는 혼란상태에서 저는 저의 위치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1959년 유럽에서 인정받은 저의 첫 작품들은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작품”과 ”7악기를 위한 음악”입니다. 이 가운데에 피아노작품들이 아직 심하게 12음기법에 메여있는 반면에, 1959년 Darmstadt 에서 초연되었던 “7악기를 위한 음악”은 특히 그의 2악장 첫머리에서 처음으로 제가 그 후에 중국과 한국음악의 전통을 회고하며 “주요음향법”으로 발전시키게 되는 것이 싹트게 됩니다.
제가 저의 작곡기법에서 작은 규모의 편성을 위해서는 “주요음(Haupt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반면에 오케스트라 작품의 음향조직에 한해서는 “주요음향(Haupkklang)”이라고 말하는 데 대하여 음악학자들은 자주 이것이 애매하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는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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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요음기법 (Haupttontechnik)” 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의 작곡기법에서 이 주요음기법이 동아시아의 음악언어가 유럽의 전위음악의 그것과 융합되어가는 과정의 바로 그중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요음향기법(Hauptklangtechnik)”은 제가 60년대 초반부터 개척해 왔읍니다. 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것이 좀 더 쉽게 파악되고,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되도록 점차 수정되어 갔읍니다.
Christian Martin Schmidt가 정확히 파악했듯이 “주요음기법”의 개념은 하나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저의 음악언어의 기본이 되는 것이며 또한 저의 작곡기법의 보편적인 원칙입니다. 이 작곡기법은 그 근원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음향관념(Klangvorstellung)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 아시아적인 원칙이 그 형태를 얻을 때에는 바로 유럽적인 무조음악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중국과 한국의 고전음악은 원칙적으로 단음적이며, 그의 음악적인 흐름은 선(線) 적입니다. 아시아의 음악적 미학은 주로 5개의 주요음으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이 5개의 음은 언어가 되기 위해 하나 하나의 음으로 고립되어져서 다른 음들과 함께 음의 연속으로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음은 처음 시작에서부터 사라질 때까지 변화의 법칙에 일관되어 집니다. 이것을 저는 도교에서 말하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읍니다.
전타음(前打音), 음의 순간적 장식, 미끄러움, 음군의 동요 그리고 음색의 뉘앙스와 다이너믹은 음과 양의 원칙이 정(靜) 내지 동(動)의 상관관계 원칙으로써 작용하는 과정 중의 한 부분입니다. 도교적인 변화의 개념은 항구적인 변형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각개의 음은 음을 내기 시작하자마자 이미 그 속에 자신의 진행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이 전개됨으로써 언어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소우주로써의 부분은 전체를 즉 대우주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제가 유럽에서 처음 몇 년간 12음기법으로 작곡하며 저 자신의 언어를 찾고 있는 가운데, 이 유럽의 복음악적 체계가 저에게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을 알았읍니다. 즉 12음을 단순히 서로 연관시키는 것으로는 저 자신의 표현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에게는 단순한 무조(無調)적인 체계에 아시아적인 음향법칙을 끌어들여 작품을 단지 흥미롭게 만든다는 것도 거북스러웠읍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의 방향, 즉 동아시아의 전통을 현대의 그리고 서구의 언어에 이전하는 방향을 취했읍니다.
선(線) 적인 음의 흐름이라는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주요음을 이질음적으로 분열시켜(헤테르포니) 주요음향 혹은 주요음향군으로 만든다는 것이 별로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요음향기법이라는 용어가 음의 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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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표현 구성이라는 특수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만, 이는 규칙적 카논(Regelkanon) 이라는 방법에서가 아니라, 무진한 가능성의 잠재라는 의미에서, 즉 가능성이 개체적으로 구체화 되어지는 것이 전체의재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전체성은 또한 주요음향군의 연속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제가 과감하게 개성적이며 주관적인 표현을 시도함으로써,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쓰여진 “7악기를 위한 음악”이 그 2악장에서 현대음악인의 대부분에게 너무 감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긴 했지만, 저는 개체적인 음, 즉 주요음향을 찾았으며, 이것은 저에게 “12개의 단순한 상호 연관적인 음들”의 얼굴없는 다양성 대신에 개인적인 것을 갖도록 하는 것 같았읍니다.
이 주요음이 음악을 기계화 내지 기술화 하는 대신에 개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개성은 보편적 이해를 불허하는 미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의 음향기법은, 내가 의식적으로 명확한 반복을 피한다 할지라도, 충분한 수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 특징들은 그 명확성으로 인해 개체적인 표현형태가 어떻게 변형되던 간에 곧 확인 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요음향기법은 각기 다양하게 구체화 되어진 특징적인 동작들의 레퍼터리를 가능하게 하며, 그러므로 언어가 되고 이로써 객관적 내지 적어도 중간주관적(intersubjektive, ‘간間 주관적’) 이해를 가능케 합니다.
50년대 중반부터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쎄리주의 기법으로부터의 전반적인 이탈추세는 저로 하여금 저의 작곡기법이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전제조건이었읍니다. 거기에다 이미 음악에 있어서 동-서 관계가 상당히 진전되었기 때문에, 1955년 경의 작곡사적 상황을 돌이켜 보면 주요음향기법은 당시에 잉태되어졌던 것의 역사적귀결 가운데 하나의 결단성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Olivier Messiaen은 개별적으로 고전 인도음악의 리듬을 찾아냈으며, 또한 그의 제자 Pierre Boulez가 구조결정론적인 “Formanten”과 “조종되는 즉흥(Gelenkter Improvisation)”을 연결시킴으로서 소위 “개방된 형식 (Offene Form)”을 찾게 되자, 이제는 비 구라파 음악세계에 대한 경험이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60년대 초반에 다른 작곡가들이 아직 음향자료의 확대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저는 동아시아의 음악경험을 유럽적 무조음악으로 형성하는 길을 개척하고 있는 중이었읍니다. 이 음악을 만드는 데에 저는 물론 전위적인 연주 내지 표현기술과 연결시켰으며, 주로 유럽의 전위음악에서 당시 통례로 쓰였던 악기들로 만족했읍니다.
저에게 Gyory Ligeti와 Krzystof Penderecki 양인이 60년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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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또한 결정적으로 음향작곡(Klangkomposition)으로 이끌어갔던 것을 회고해 볼 때, 저의 작곡적 발전이 거의 끊이지 않고 현대음악의 전반적인 추세이행에 합류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읍니다. [그리하여 1961년에 이미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착적 음향 (Colloides Sonores) 이 출현하게 되었읍니다.]
음색구조(Klangfarbenstukturen)의 구체적 형성으로 쎄리얼기법의 논리는 최종적으로 해체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현저히 약화되었읍니다: 즉 음렬에 따라 결정된(determiniert) 음의 고저 구조에 대신해서 음향평면(Klangflachen)이 대두되었읍니다. 음악의 흐름에 대한 작곡적 작업은 음조망(音調網: Tongeflecht) 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것을 Ligeti는 음악적인 “직물(Textur)”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읍니다. 그는 서구의 음악이론 전통에 맞추어 이 표기로 제각기 다양한 밀도와 구조를 가진 음의 개체들로 짜여진 직물을 말하고자 했읍니다.
그러나 Ligeti는 개체음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를 주지 않고 있읍니다만, 저의 음향경험이나 음향구성은 항상 개체음에서 시작합니다.
”주요음”을 이질음소로 분열시키고(헤테로포니-), 또 “주요음향”으로부터는 비슷하거나 전연 반대되는 음향구성으로 된 평면을 형성하게 되자, 음악이 때로는 그리 과격하지 않게 소음음악 같은 것에 접근케 되는 결과에 도달했읍니다. 사람들은 저의 음향작곡기법에 관해 “복합음악적 요소(Polyphonie, 다성음악)”를 들어 말합니다. 이것은 적합한 표현이 아닙니다. 복합음악[다성음악]이란 대위법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며, 이 대위법은 변증법적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원론의 원칙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범주는 서구음악에 특징적인 것들이 될 수 있으나, 저의 음악은 결정적으로 아시아적인 관념에 의해 규정됩니다. 아시아인은 이원론적인 관념이 아니라, 양극론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에서는 도교적 원칙 정중동(靜中動)이 안정-불안정 등과 같은 양극 범주의 상위개념이 됩니다.
아시아 인은 발전 대신에 보완이라던가 변화에 대해서 말하며, 그리고 항구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강박 (관념)” 대신에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작용이라는 관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음악은 표면적으로는 다음악적임에도 불구하고[그 가공Faktur에 있어 다성부Vielstimmigkeit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에 있어서는 일원론적(monistisch)입니다. 음향의 흐름은 주요음향이란 개념의 향방에 합류됩니다.
이것을 “Reak”에서 볼 것 같으면, 각자의 악기군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지만, 그 집단 속에서 하나 하나의 악기는 개체로서 전체에 기여합니다.
음향작곡이 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전반적인 특징을 이루었다고 제가 말했읍니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구분점들이 있읍니다. 왜냐하면, 이 십여년 간의 음악 속에는 작품개념(Werkbegr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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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서구 예술음악의 미학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었던 것은 이미 방법론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자료의 수용에 관한 것이었읍니다. 예를 들면, 자주 실험이라고 불리워진 연극적 요소들이 작품에 수용되었다던가 하는 국부적인 것 들 뿐만 아니라, 소제기(Handstaubsauger 간이 진공청소기)의 잡음 같은 것들이 음악화 되었읍니다.
음악화 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음향들이 과장효과를 목적으로 비자연화되어 그로테스크하거나 황당무계의 지경에까지 다다릅니다. 쎄리얼적인 작곡기법에 이미 내포되어졌던 주관탈피의 진전은 이제 개인적인 표현을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대두됩니다. 이 과정은 전후 서독의 경직된 사회 질서를 개선하기 위한 재건설의 전조가 대두되자, 과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진행되었읍니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저의 음악은 이러한 미학으로부터는 아주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받았읍니다. 몇몇개의 소품을 제외하고는[소품들까지를 포함해] 저의 작품들은 그 주요부분에 있어서[모든 의미에 있어서] 명백히 결정적인(determiniert결정된/확정된) 면을 가지고 있읍니다. 1966년에 “Reak”이 Donaueschingen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과는 달리[-들 보다 (제가)] 전통에 가까운 특수한 음악적인 면을 고수한 데에도[전통에 더욱 맞닿아 있는 음악의 특수한 영역 내에 머물렀다는 점에] 있지 않은가 합니다.
학생운동이라는 소요를 낳았던 사회적인 변화가 있은 후, 70년대 중반기에 새로운 음악은 그 발전도상에서 일련의 후퇴경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경향은, 불충분한 표현입니다만, “신 간략주의(neue Einfachheit)” 라던가 “신 주관주의(neue Subjektivität)’, 혹은 “신낭만주의 (Neoromantik)” 같은 표어로 표현되었습니다. Donaueschingen이라던가 Darmstadt와 같은 중심지들의 역할은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작곡장르의 미학은 한층 개성적으로 되어갔읍니다. 그러나 역시 작품개념(Werkbergriff)은 복고되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읍니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 저의 음악의 주제들은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온 내용들이었읍니다. 저의 자서전에서 “납치(Entführung)”라고 표현되어진 인간적인, 정치적인 경험을 통하여, 또한 서양의 정치 사회적인 발전적 양상을 통해서[정치- 사회적 전개를 거치며] 저에게는 이러한 제반상황에 대한 저의 입장을 표명하고자 하는,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좀더 명백한 음악적 언어로 구사해보고자 하는 소망이 생겼읍니다. 이러한 소망은 제 음악의 엄격한 구조를 연화시키도록 했읍니다. 1971년의 작품 “차원들(Dimensionen)” 까지의 음향적 작곡이 오히려 정태적(statisch)이며 구조적이었다고 한다면, 그 후의 시기는 대립되는 진행과정을 좀더 예리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읍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저는 연속적(sukzessive) 방법을 취했습니다. 1972년의 작품 “협주적[합주적] 음형들(Konzertan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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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n)”에서는 유동하는 음향평면(fluktuierender Klangflachen)에 대신해서 분산하고 분출하는(divergierende) 악기군이 나타납니다.
1978년의 작품 “무악(Muak)”에서는 구성원칙(Gestaltungsprinzip)으로써 처음으로 기동적인[균일화된/기계적인motorisch] 리듬이 사용되었읍니다. 그때까지 저는 리듬을 음악의 구조요소로 사용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왔읍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전통은 박자의 개념도 소절의 개념도 희박하며, 그 대신 주기화된 리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음악의 기보(記譜)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연주를 위한 실용성 때문에 소절선이나 메트로놈 표시를 사용해 왔읍니다. 이에 반해 “무악”에서는 박자의 의미가 증가되고 있읍니다. :무악:에서는 소위 “꾀꼬리 춤(춘앵전)”이라는 중국과 한국의 궁중무를 유럽의 개성무용(Charaktertanz 캐릭터댄스)과 대질시켰읍니다. 이들의 특성은 박자 없이는 거의 전달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외에도, 무악에서 처음으로 저는 두개의 서로 다른 음악세계를 대질시키려고 시도했읍니다. 이러한 점에서도 역시 누구나 일종의 음악적인 동서 교량을 확인할 수 있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항상 상반되는 두개의 특성을 구성해 내기 위해서 먼저 서로 분열하려는 요소들을 평형상태로 이끌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관계를 구성해 내는 점에 있어서는 저의 기악협주곡(Instrumentalkonzerte)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기악협주곡 속의 상대관계는 자서전적이거나, 사회와 개인의 대치관계처럼 파악되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적인 경험을 내포하고 있읍니다. 여기에서 저는 세계관적인 내용들을 동화나 우화로 취급하려고 했읍니다. 내용과 형태 (구성) 의 엄격성에 관한 한 1980년의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 (Exemplum in memoriam Kwangju)”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광주의 시민봉기가 피비린내나게 압제당한 것에 항의해서 썼읍니다. 광주의 시민봉기는 독재자 박이 살해된 후 제 고향의 민주화를 위한 해방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은 그 후계정권에 의해서 1980년 오월에 일대 유혈극을 치른 후에 억눌러 졌읍니다. 나치의 박해에 희생된 Albercht Haushofer와 Nelly Sachs의 시를 주제로 한 칸타나 역시 이러한 맥락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그러나 정치적인 음악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저의 내적인 신념에 음악적인 표현을 주고자 했던 것들입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저는 협주곡과 교향곡 같은 유럽의 장르[를 내것으로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 주제[Stoffe소재]들[에]도 취급하고자 했읍니다[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최종적인 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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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연주자에게 내맡기는 우연성이라는 의미의 “개방적 형태”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읍니다. 이러는 중에 형식의 개념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저의 작곡은 형식상으로는 항상 개방되어 있었읍니다. 저의 작품들은 도교적 원칙을 추구하는 가운데에서의 도의 선언[현현, 현시Manifestationen]입니다. 이 소리의 표면상의 시작은 이미 들리지 않게 사라지기 시작한 음의 속행이며, 이것이 생명선을 거쳐 사라진 다음 다시 미래의, 들을 수 없는 것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소리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교적 관념을 저는 포기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유럽의 장르와의 대결 속에서 형식의 개념(Formkonzeption)은 좀더 형식적인 실재성이라는 방향으로 수정해 갔읍니다.[-포기하지 않았습니다만, 유럽적 장르들과의 대결 속에서 이와 같은 (열려있는 것으로서의) 형식에 대한 구상은 닫힌 형식의 방향으로 크게 수정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관[형식관]의 수정은 저에게 바이올린 협주곡(1981) 그리고 교향곡 1, 2번과 같은 좀더 광범위한 개념[구상]을 가지도록[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저는 오늘의 저의 음악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접근과정 뿐만 아니라, 동과 서의 전통이 융합되는 과정을 봅니다.[이와 같이 저는 제 음악을 동양과 서양전통 간의 접근이 진전되는 과정으로서만이 아니라 양자의 융합이 진전되는 과정으로 파악합니다]. 저의 초기작품들이 소우주로써 상상되어지는 대우주의 전체성으로부터 잘려나온 구체적 단면이었다고 한다면[만일 저의 초기작품들이 대우주(Makrokosmos)라는 상상적 전체에서 잘려나온 소우주 곧 하나의 구체적 단편이었다면], [이와 같이] 저의 새로운[최근의neuere] 형태관[형식에 대한 구상Formkonzeption]은 내적으로 비교적 완수된 발전전개과정[그 자체 안에서 상대적으로 완결되어진 전개과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서양의 시간감각에 접근함으로써 저는 시간의 차원을 전망(Perspektive)이라는 개념으로써 음악 자체에 수용시키고자 했읍니다.[서양의 시간감각에 접근함에 있어 저는 시간이라는 차원을 하나의 관점(Perspektive)으로서 음악 자체 내부에 연관시켜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교향곡들은[역시도] 자신의 시간성을 벗어나서, 좀더 인간적인 것을 향해 호소하고 있읍니다. (번역: 현경애 / 번역수정: 골드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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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은 독어로 원고를 썼고 현경애가 국역하였습니다. 자료적 가치를 생각해
늦어도 1985년의 명예박사 학위수여식에서 윤이상 선생이 직접 확인했을 번역본을 최소한의 맞춤법 교정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입력했습니다. 제가 원문과 대조한 내용상의 차이나 덧붙이는 내용은 본문 중의 오렌지색 첨어로 대신합니다.
원문과 대조한 내용이 아직 모두 반영되어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수정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