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a dream

February 26, 2009

정 중 동 (靜中動), 유럽에서 나의 작곡발전상에 관하여 – 윤이상

Filed under: 작곡가 윤이상(Isang Yun) — yheejean @ 3:10 pm

정 중 동 (靜中動

유럽에서 나의 작곡발전상에 관하여 ( Tübingen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수여식에서 한 강연)

-         윤이상

 
 

 
 

저에게 주어진 이 영광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저의 작품에 주어진 영광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개자의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저의 음악에 대해서 항상 되풀이되어 말하여지는 것은 그것이 동아시아 전통을 서구라파 예술음악의 언어로 개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동아시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의 궁중 음악언어들뿐 만 아니라, 신화적인 소재들 혹은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모든조형 예술의 모티브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70년대 초반기까지 명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조나 융합의 과정이 어떻게 저의 음악 속에 나타나고 있는가 에 대해서는 아직 전연 숙고되어 본 적이 없읍니다. 그리고 또한 두 개의 이토록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문화가 서로 만나는 과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그것이 어디로 이끌어져 갈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모릅니다. 저의 작품으로써 음악의 영역에서 대리되어지고, 그래서 그 흐름이 동양에서부터 서양으로 가게 되는 이 만남의 과정은 분명히 음악 문화적, 사회적인 유례를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례들이란 그들이 상호 이해와 통합을 가져 올 것인지 또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가능하게 된 것인지 우리가 아직 답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이 시간을 저는 저의 거의 30년에 걸친 유럽에서의 작곡 생활을 돌이켜 보고자 하며, 이로써 저의 음악에 대한 이해와 그 속에 깃듯 음악의 동서관계를 이해시키는 기회로 갖고자 합니다.

 
 

 50년대 말에 저의 첫 작품이 인정받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5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은 현대음악에서 그때까지 계승되어온 쎄리얼 음악의 교조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는 그 어떤 전망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가 1956년에 최신의 작곡법을 배우기 위해서 파리에 왔을 때 저는 Tony Aubin 에게서 작곡교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때 그의 제자들과 함께 Beethoven 과 Wagner 를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이론은 Dukas의 제자인 Pierre Revel 에 사사 받았으며, 여기에서 저는 19세기에 필수적이었던 파리- “consevatoire”의 전통을 배웠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현대작곡가로 알려진 사람들은 Andre Jolivert, Jean Rivier, Henri Sauge, Alexandre Tansman,

 
 

[이상 23]

그리고 Olivier Messiaen 이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그러나 저에게는 낯선 것이었읍니다.  

 저는 아직 저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으며, 또한 저 자신의 특유한 음악적 언어를 찾기 위해 이들에게 연결지을 만한 그 어떤 자질도 발견하지 못했읍니다.

 Berlin 에서 저는 Josef Rufer 에게 신 빈파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Josef Rufer 의 ”12음으로의 작곡” 이란 저서를 저는 일본어출판본으로 읽었던 바 있습니다.

 저에게 좋은 스승이었던 분은 또한 Boris Blacher 였습니다. 그는그의 제자들에게 이색적인 것을 설득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 특유의 음악을 찾도록 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1958년에 처음으로 Darmstadt에서 개최된 ”국제하기강습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해는 바로 John Cage 도 처음으로 거기에 참석했던 해입니다. 1957년에 이미 Darmstadt에서 그 유명한 Stock-Hausen 의 “Klavierstück XI”가 초연되었으며 또한 Pierre Boulez는 프로그람적인 강연 “Alea”를 개최하였읍니다. 이로써 Hans Vogt가 정신적인 고향을 잃어버린 전후세대의 “체제에로의 도피”라고 특징지웠던 쎄리엘 주의로부터의 탈피가 명백해 졌읍니다. Cage는 이제 음악작품이라는 개념을 문제에 부쳤을 뿐 아니라, 음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까지도 논란을 일으켰읍니다.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현혹되기도 했읍니다. 왜냐하면 한 작곡가가 이 당시에 내릴 수있는 결단이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개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작품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보장하는 음악적 제 재료의 완전한 결정론과, 또 다른 한편 “원칙으로서의 우연” 속에서 최상의 자유를 찾는 비결정론의 대립으로 빚어지는 혼란상태에서 저는 저의 위치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1959년 유럽에서 인정받은 저의 첫 작품들은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작품”과 ”7악기를 위한 음악”입니다. 이 가운데에 피아노작품들이 아직 심하게 12음기법에 메여있는 반면에, 1959년 Darmstadt 에서 초연되었던 “7악기를 위한 음악”은 특히 그의 2악장 첫머리에서 처음으로 제가 그 후에 중국과 한국음악의 전통을 회고하며 “주요음향법”으로 발전시키게 되는 것이 싹트게 됩니다.

 제가 저의 작곡기법에서 작은 규모의 편성을 위해서는 “주요음(Haupt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반면에 오케스트라 작품의 음향조직에 한해서는 “주요음향(Haupkklang)”이라고 말하는 데 대하여 음악학자들은 자주 이것이 애매하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는 분명  

[이상 24]

 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요음기법 (Haupttontechnik)” 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의 작곡기법에서 이 주요음기법이 동아시아의 음악언어가 유럽의 전위음악의 그것과 융합되어가는 과정의 바로 그중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요음향기법(Hauptklangtechnik)”은 제가 60년대 초반부터 개척해 왔읍니다. 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것이 좀 더 쉽게 파악되고,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되도록 점차 수정되어 갔읍니다.

 Christian Martin Schmidt가 정확히 파악했듯이 “주요음기법”의 개념은 하나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저의 음악언어의 기본이 되는 것이며 또한 저의 작곡기법의 보편적인 원칙입니다. 이 작곡기법은 그 근원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음향관념(Klangvorstellung)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 아시아적인 원칙이 그 형태를 얻을 때에는 바로 유럽적인 무조음악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중국과 한국의 고전음악은 원칙적으로 단음적이며, 그의 음악적인 흐름은 선() 적입니다. 아시아의 음악적 미학은 주로 5개의 주요음으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이 5개의 음은 언어가 되기 위해 하나 하나의 음으로 고립되어져서 다른 음들과 함께 음의 연속으로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음은 처음 시작에서부터 사라질 때까지 변화의 법칙에 일관되어 집니다. 이것을 저는 도교에서 말하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읍니다.

 전타음(前打音), 음의 순간적 장식, 미끄러움, 음군의 동요 그리고 음색의 뉘앙스와 다이너믹은 음과 양의 원칙이 정() 내지 동()의 상관관계 원칙으로써 작용하는 과정 중의 한 부분입니다. 도교적인 변화의 개념은 항구적인 변형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각개의 음은 음을 내기 시작하자마자 이미 그 속에 자신의 진행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이 전개됨으로써 언어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소우주로써의 부분은 전체를 즉 대우주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제가 유럽에서 처음 몇 년간 12음기법으로 작곡하며 저 자신의 언어를 찾고 있는 가운데, 이 유럽의 복음악적 체계가 저에게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을 알았읍니다. 즉 12음을 단순히 서로 연관시키는 것으로는 저 자신의 표현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에게는 단순한 무조(無調)적인 체계에 아시아적인 음향법칙을 끌어들여 작품을 단지 흥미롭게 만든다는 것도 거북스러웠읍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의 방향, 즉 동아시아의 전통을 현대의 그리고 서구의 언어에 이전하는 방향을 취했읍니다.

선() 적인 음의 흐름이라는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주요음을 이질음적으로 분열시켜(헤테르포니) 주요음향 혹은 주요음향군으로 만든다는 것이 별로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요음향기법이라는 용어가 음의 구체

[이상 25]

 적인 표현 구성이라는 특수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만, 이는 규칙적 카논(Regelkanon) 이라는 방법에서가 아니라, 무진한 가능성의 잠재라는 의미에서, 즉 가능성이 개체적으로 구체화 되어지는 것이 전체의재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전체성은 또한 주요음향군의 연속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제가 과감하게 개성적이며 주관적인 표현을 시도함으로써,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쓰여진 “7악기를 위한 음악”이 그 2악장에서 현대음악인의 대부분에게 너무 감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긴 했지만, 저는 개체적인 음, 즉 주요음향을 찾았으며, 이것은 저에게 “12개의 단순한 상호 연관적인 음들”의 얼굴없는 다양성 대신에 개인적인 것을 갖도록 하는 것 같았읍니다.

이 주요음이 음악을 기계화 내지 기술화 하는 대신에 개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개성은 보편적 이해를 불허하는 미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의 음향기법은, 내가 의식적으로 명확한 반복을 피한다 할지라도, 충분한 수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 특징들은 그 명확성으로 인해 개체적인 표현형태가 어떻게 변형되던 간에 곧 확인 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요음향기법은 각기 다양하게 구체화 되어진 특징적인 동작들의 레퍼터리를 가능하게 하며, 그러므로 언어가 되고 이로써 객관적 내지 적어도 중간주관적(intersubjektive, ‘간 주관적’) 이해를 가능케 합니다.

 50년대 중반부터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쎄리주의 기법으로부터의 전반적인 이탈추세는 저로 하여금 저의 작곡기법이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전제조건이었읍니다. 거기에다 이미 음악에 있어서 동-서 관계가 상당히 진전되었기 때문에, 1955년 경의 작곡사적 상황을 돌이켜 보면 주요음향기법은 당시에 잉태되어졌던 것의 역사적귀결 가운데 하나의 결단성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Olivier Messiaen은 개별적으로 고전 인도음악의 리듬을 찾아냈으며, 또한 그의 제자 Pierre Boulez가 구조결정론적인 “Formanten”과 “조종되는 즉흥(Gelenkter Improvisation)”을 연결시킴으로서 소위 “개방된 형식 (Offene Form)”을 찾게 되자, 이제는 비 구라파 음악세계에 대한 경험이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60년대 초반에 다른 작곡가들이 아직 음향자료의 확대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저는 동아시아의 음악경험을 유럽적 무조음악으로 형성하는 길을 개척하고 있는 중이었읍니다. 이 음악을 만드는 데에 저는 물론 전위적인 연주 내지 표현기술과 연결시켰으며, 주로 유럽의 전위음악에서 당시 통례로 쓰였던 악기들로 만족했읍니다.

저에게 Gyory Ligeti Krzystof Penderecki 양인이 60년대의

[이상 26]

음악을 또한 결정적으로 음향작곡(Klangkomposition)으로 이끌어갔던 것을 회고해 볼 때, 저의 작곡적 발전이 거의 끊이지 않고 현대음악의 전반적인 추세이행에 합류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읍니다. [그리하여 1961년에 이미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착적 음향 (Colloides Sonores) 이 출현하게 되었읍니다.]

 음색구조(Klangfarbenstukturen)의 구체적 형성으로 쎄리얼기법의 논리는 최종적으로 해체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현저히 약화되었읍니다: 즉 음렬에 따라 결정된(determiniert) 음의 고저 구조에 대신해서 음향평면(Klangflachen)이 대두되었읍니다. 음악의 흐름에 대한 작곡적 작업은 음조망(音調網: Tongeflecht) 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것을 Ligeti는 음악적인 “직물(Textur)”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읍니다. 그는 서구의 음악이론 전통에 맞추어 이 표기로 제각기 다양한 밀도와 구조를 가진 음의 개체들로 짜여진 직물을 말하고자 했읍니다.

그러나 Ligeti는 개체음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를 주지 않고 있읍니다만, 저의 음향경험이나 음향구성은 항상 개체음에서 시작합니다.

 ”주요음”을 이질음소로 분열시키고(헤테로포니-), 또 “주요음향”으로부터는 비슷하거나 전연 반대되는 음향구성으로 된 평면을 형성하게 되자, 음악이 때로는 그리 과격하지 않게 소음음악 같은 것에 접근케 되는 결과에 도달했읍니다. 사람들은 저의 음향작곡기법에 관해 “복합음악적 요소(Polyphonie, 다성음악)”를 들어 말합니다. 이것은 적합한 표현이 아닙니다. 복합음악[다성음악]이란 대위법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며, 이 대위법은 변증법적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원론의 원칙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범주는 서구음악에 특징적인 것들이 될 수 있으나, 저의 음악은 결정적으로 아시아적인 관념에 의해 규정됩니다. 아시아인은 이원론적인 관념이 아니라, 양극론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에서는 도교적 원칙 정중동(靜中動)이 안정-불안정 등과 같은 양극 범주의 상위개념이 됩니다.

 아시아 인은 발전 대신에 보완이라던가 변화에 대해서 말하며, 그리고 항구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강박 (관념)” 대신에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작용이라는 관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음악은 표면적으로는 다음악적임에도 불구하고[그 가공Faktur에 있어 다성부Vielstimmigkeit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에 있어서는 일원론적(monistisch)입니다. 음향의 흐름은 주요음향이란 개념의 향방에 합류됩니다.

이것을 “Reak”에서 볼 것 같으면, 각자의 악기군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지만, 그 집단 속에서 하나 하나의 악기는 개체로서 전체에 기여합니다.

 
 

 음향작곡이 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전반적인 특징을 이루었다고 제가 말했읍니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구분점들이 있읍니다. 왜냐하면, 이 십여년 간의 음악 속에는 작품개념(Werkbegriff)

 

[이상 27]

 
 

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서구 예술음악의 미학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었던 것은 이미 방법론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자료의 수용에 관한 것이었읍니다. 예를 들면, 자주 실험이라고 불리워진 연극적 요소들이 작품에 수용되었다던가 하는 국부적인 것 들 뿐만 아니라, 소제기(Handstaubsauger 간이 진공청소기)의 잡음 같은 것들이 음악화 되었읍니다.

음악화 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음향들이 과장효과를 목적으로 비자연화되어 그로테스크하거나 황당무계의 지경에까지 다다릅니다. 쎄리얼적인 작곡기법에 이미 내포되어졌던 주관탈피의 진전은 이제 개인적인 표현을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대두됩니다. 이 과정은 전후 서독의 경직된 사회 질서를 개선하기 위한 재건설의 전조가 대두되자, 과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진행되었읍니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저의 음악은 이러한 미학으로부터는 아주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받았읍니다. 몇몇개의 소품을 제외하고는[소품들까지를 포함해] 저의 작품들은 그 주요부분에 있어서[모든 의미에 있어서] 명백히 결정적인(determiniert결정된/확정된) 면을 가지고 있읍니다. 1966년에 “Reak”이 Donaueschingen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과는 달리[-들 보다 (제가)] 전통에 가까운 특수한 음악적인 면을 고수한 데에도[전통에 더욱 맞닿아 있는 음악의 특수한 영역 내에 머물렀다는 점에] 있지 않은가 합니다.

 
 

 학생운동이라는 소요를 낳았던 사회적인 변화가 있은 후, 70년대 중반기에 새로운 음악은 그 발전도상에서 일련의 후퇴경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경향은, 불충분한 표현입니다만, “신 간략주의(neue Einfachheit)” 라던가 “신 주관주의(neue Subjektivität)’, 혹은 “신낭만주의 (Neoromantik)” 같은 표어로 표현되었습니다. Donaueschingen이라던가 Darmstadt와 같은 중심지들의 역할은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작곡장르의 미학은 한층 개성적으로 되어갔읍니다. 그러나 역시 작품개념(Werkbergriff)은 복고되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읍니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 저의 음악의 주제들은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온 내용들이었읍니다. 저의 자서전에서 “납치(Entführung)”라고 표현되어진 인간적인, 정치적인 경험을 통하여, 또한 서양의 정치 사회적인 발전적 양상을 통해서[정치- 사회적 전개를 거치며] 저에게는 이러한 제반상황에 대한 저의 입장을 표명하고자 하는,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좀더 명백한 음악적 언어로 구사해보고자 하는 소망이 생겼읍니다. 이러한 소망은 제 음악의 엄격한 구조를 연화시키도록 했읍니다. 1971년의 작품 “차원(Dimensionen)” 까지의 음향적 작곡이 오히려 정적(statisch)이며 구조적이었다고 한다면, 그 후의 시기는 대립되는 진행과정을 좀더 예리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읍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저는 연속적(sukzessive) 방법을 취했습니다. 1972년의 작품 “협주적[합주적] 음형들(Konzertanten-

 

[이상 28]

 

Figuren)”에서는 유동하는 음향평면(fluktuierender Klangflachen)에 대신해서 분산하고 분출하는(divergierende) 악기군이 나타납니다.

 1978년의 작품 “무악(Muak)”에서는 구성원칙(Gestaltungsprinzip)으로써 처음으로 기동적인[균일화된/기계적인motorisch] 리듬이 사용되었읍니다. 그때까지 저는 리듬을 음악의 구조요소로 사용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왔읍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전통은 박자의 개념도 소절의 개념도 희박하며, 그 대신 주기화된 리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음악의 기보(記譜)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연주를 위한 실용성 때문에 소절선이나 메트로놈 표시를 사용해 왔읍니다. 이에 반해 “무악”에서는 박자의 의미가 증가되고 있읍니다. :무악:에서는 소위 “꾀꼬리 춤(춘앵전)”이라는 중국과 한국의 궁중무를 유럽의 개성무용(Charaktertanz 캐릭터댄스)과 대질시켰읍니다. 이들의 특성은 박자 없이는 거의 전달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외에도, 무악에서 처음으로 저는 두개의 서로 다른 음악세계를 대질시키려고 시도했읍니다. 이러한 점에서도 역시 누구나 일종의 음악적인 동서 교량을 확인할 수 있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항상 상반되는 두개의 특성을 구성해 내기 위해서 먼저 서로 분열하려는 요소들을 평형상태로 이끌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관계를 구성해 내는 점에 있어서는 저의 기악협주곡(Instrumentalkonzerte)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기악협주곡 속의 상대관계는 자서전적이거나, 사회와 개인의 대치관계처럼 파악되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적인 경험을 내포하고 있읍니다. 여기에서 저는 세계관적인 내용들을 동화나 우화로 취급하려고 했읍니다. 내용과 형태 (구성) 의 엄격성에 관한 한 1980년의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 (Exemplum in memoriam Kwangju)”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광주의 시민봉기가 피비린내나게 압제당한 것에 항의해서 썼읍니다. 광주의 시민봉기는 독재자 박이 살해된 후 제 고향의 민주화를 위한 해방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은 그 후계정권에 의해서 1980년 오월에 일대 유혈극을 치른 후에 억눌러 졌읍니다. 나치의 박해에 희생된 Albercht Haushofer와 Nelly Sachs의 시를 주제로 한 칸타나 역시 이러한 맥락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그러나 정치적인 음악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저의 내적인 신념에 음악적인 표현을 주고자 했던 것들입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저는 협주곡과 교향곡 같은 유럽의 장르[를 내것으로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 주제[Stoffe소재][에] 취급하고자 했읍니다[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최종적인 음의

 
 

[이상 29]

 
 

결정을 연주자에게 내맡기는 우연성이라는 의미의 “개방적 형태”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읍니다. 이러는 중에 형식의 개념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저의 작곡은 형식상으로는 항상 개방되어 있읍니다. 저의 작품들은 도교적 원칙을 추구하는 가운데에서의 도의 선언[현현, 현시Manifestationen]입니다. 이 소리의 표면상의 시작은 이미 들리지 않게 사라지기 시작한 음의 속행이며, 이것이 생명선을 거쳐 사라진 다음 다시 미래의, 들을 수 없는 것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소리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교적 관념을 저는 포기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유럽의 장르와의 대결 속에서 형식의 개념(Formkonzeption)은 좀더 형식적인 실재성이라는 방향으로 수정해 갔읍니다.[-포기하지 않았습니다만, 유럽적 장르들과의 대결 속에서 이와 같은 (열려있는 것으로서의) 형식에 대한 구상은 닫힌 형식의 방향으로 크게 수정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관[형식관]의 수정은 저에게 바이올린 협주곡(1981) 그리고 교향곡 1, 2번과 같은 좀더 광범위한 개념[구상]을 가지도록[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저는 오늘의 저의 음악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접근과정 뿐만 아니라, 동과 서의 전통이 융합되는 과정을 봅니다.[이와 같이 저는 제 음악을 동양과 서양전통 간의 접근이 진전되는 과정으로서만이 아니라 양자의 융합이 진전되는 과정으로 파악합니다]. 저의 초기작품들이 소우주로써 상상되어지는 대우주의 전체성으로부터 잘려나온 구체적 단면이었다고 한다면[만일 저의 초기작품들이 대우주(Makrokosmos)라는 상상적 전체에서 잘려나온 소우주 곧 하나의 구체적 단편이었다면], [이와 같이] 저의 새로운[최근의neuere] 형태관[형식에 대한 구상Formkonzeption]은 내적으로 비교적 완수된 발전전개과정[그 자체 안에서 상대적으로 완결되어진 전개과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서양의 시간감각에 접근함으로써 저는 시간의 차원을 전망(Perspektive)이라는 개념으로써 음악 자체에 수용시키고자 했읍니다.[서양의 시간감각에 접근함에 있어 저는 시간이라는 차원을 하나의 관점(Perspektive)으로서 음악 자체 내부에 연관시켜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교향곡들은[역시도] 자신의 시간성을 벗어나서, 좀더 인간적인 것을 향해 호소하고 있읍니다. (번역: 현경애 / 번역수정: 골드문트) 

 
 

[이상 30. ]

 
 

 
 

윤이상 선생은 독어로 원고를 썼고 현경애가 국역하였습니다. 자료적 가치를 생각해

늦어도 1985년의 명예박사 학위수여식에서 윤이상 선생이 직접 확인했을 번역본을 최소한의 맞춤법 교정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입력했습니다. 제가 원문과 대조한 내용상의 차이나 덧붙이는 내용은 본문 중의 오렌지색 첨어로 대신합니다.

원문과 대조한 내용이 아직 모두 반영되어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수정하겠습니다.

윤이상의 미학과 우리

Filed under: 작곡가 윤이상(Isang Yun) — yheejean @ 2:33 pm

윤이상의 미학과 우리 (Ästhetik Isang Yuns und Wir)

-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과 주최 한국문화원 강연 (2007.2.17)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윤이상의 미학과 우리”라는 화두를 가지고 여러분과 몇 가지 생각을 함께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작곡자 윤이상은 그가 1956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이전 한국 음악계에서 그리고 1959년 다름슈타트 국제하기음악제에서의 성공 이후 유럽의 음악적 지형에서 이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한국 및 그 외 독일 등지의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유감스럽게도 이른바 동백림사건 혹은 동베를린사건이라 불리는 1967년 당시 한국의 박정희 정권에 의한 납치사건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동 작곡가의 사후 현재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는 재조명 작업에도 불구하고 과거 그가 짊어졌던 ‚반체제인사’라는 낙인이 적지 않은 경우 그저 일종의 반작용으로서 소위 ‚민주화 인사’라는 이미지로 일부 대체되었을 뿐, 아직까지 더욱 본질적인 질문이 명예회복과정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더욱 본질적인 질문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작곡가로서의’ 윤이상은 과연 누구이며 그의 음악은 어떠한지 또 그 음악에는 무엇이 담겨있는지 등의 물음일 것입니다. 이는 왜 그리고 과연 어떠한 맥락에서 윤이상의 음악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문제제기이기도 합니다.

그는 해방 직전까지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그에 따른 민족전통문화의 폭압적 단절을, 해방 직후 표면에 부상한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과 외세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동족간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가 4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럽으로 늦은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그리고 유럽에 도착해 자신이 추구해야 할 음악적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게 되는 것 조차도, 근대화 혹은 더욱 적절하게 말하자면 서구화-유럽화라는 당시 한국의 시대상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군부독재 탄압이라는 경험 그리고 그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경험까지를 모두 그는 이국 땅에서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민족의 수난’(Passion, Leiden)이라는 표현으로 떠올리는 질곡을 그 역시도 한국사람의 하나로서 함께 체험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수난이 단순한 수동적 경험으로 머물지 않고 ‚작곡가로서의’ 윤이상에 있어 음악으로 표현된다는 점,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의 독특한 ‚미학’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미학(Ästhetik)의 영역은 ‚아름다움’에 대한 학문이라는 고전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학은 이와 같은 규정에서 더욱 나아가 감각적 경험(Wahrnehmung; aísthesis) 그리고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체험에 대한 학문적 고찰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특히 창작에 임하는 예술가의 미학은 적지 않은 경우 세계, 자아 및 체험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 창작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실천적 속성을 얻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윤이상의 미학을 되새겨보는 일은 다음의 두 가지 의의를 지닙니다. 우선 그 안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지, 동양과 서양, 전통과 이식된 신문화간의 마주침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태어난 그의 예술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지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윤이상의 미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예술과 사상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 달리 말하자면 그에 마주치게 되는 자로서의 ‚우리’가 위치한 지점이 어디이냐에 따라, 윤이상의 미학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서양음악(미학) 전통에서 바라본 윤이상의 미학
  2. 한국음악(미학) 전통에서 바라본 윤이상의 미학

 

오늘의 발표에서는 윤이상 미학의 면모를 이상의 두 가지 단면을 통해 개관해보고 그로부터 한 몸뚱어리로 유기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그의 미학에 한걸음 다가서보려고 합니다.

 

1. 서양음악(미학) 전통의 관점에서 본 윤이상의 미학

 

1955년 한국나이로 불혹을 목전에 둔 윤이상은 자신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음악에 오로지 헌신할 수 없었던 20대 이후의 20년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이 20년의 세월을 나의 생애에서 떼어버리고 싶다. 우리가 공유하는 이 20년이라는 역사는 실상 나라를 도로 찾았다는 일 이외엔 그리 명예롭지도 깨끗하지도 못하다”라고 적으며(<”20 청년(靑年)이 되어서>, <내 남편 윤이상. (상)>, 이수자. 82-84쪽) 그는 앞으로 남은 생애를 오직 작곡에 몰두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해 1956년 유럽 유학길에 오르면서 윤이상은 그때까지 작곡했던 작품들을 스스로 폐기합니다.

 

새로운 음악사조를 그 현장에서 직접 접하고 신진 작곡기법, 무엇보다도 음렬주의기법(세리에주의)을 습득하고자 하는 일념을 지닌 채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그는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두 가지 계기를 만나게 됩니다. 음렬주의 사조의 퇴조가 그 첫 번째이고, 한국적 음악전통의 재인식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1.1. 첫번째 계기: 음렬주의의 쇠퇴

우선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그 제자 안톤 베베른에 의해 예비되었고 전후 1948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탐구된 서구의 음렬주의 작곡경향이 1960년을 전후하여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선 음렬주의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음렬주의는 음악사에서 후기낭만주의까지 이어진(그리고 지금도 상당수의 대중음악이 기반하고 있는) 조성음악에 대한 반발로서 20세기에 시도된 작곡기법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조성음악은 그것이 장조이든 단조이든 혹은 다른 선법(旋法)에 기초한 것이든 간에 곡 안에서 음들의 전개가 주음(Tonika; Grundton einer Tonleiter)에서 시작해 주음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C음(‚다’음)이 ‚도’인 다장조로 조성음악적으로 작곡된 곡은 역시 조성음악에 길들여진 청자가 기대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 C음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음렬주의의 선구자 격인 쇤베르크 등은 이미 바그너 등에 의해 반음계의 적극적인 사용법이 가능해진 토대 위에서 이러한 조성음악에 반기를 듭니다. 이렇게 새롭게 주창되는 신음악(Neue Musik)에서 12개의 음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고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철학자 아도르노 등은 이에 지배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철학적/미학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쇤베르크 등에서 그 음 배열의 기준이 주로 음의 높낮이(음고)였다면 50년대의 메시앙이나 슈톡하우젠의 음렬주의적 작곡에서 기준은 음의 길이, 강약, 음색, 연주방법으로까지 확장되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열은 음렬주의 경향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난관에 봉착합니다. 내적인 문제라면 이렇게 엄격하고 객관적인 규칙에 의해 작곡된 음악이 일반적인 감상자에 대해 난해한 수준을 넘어 많은 경우 그저 혼란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존재하는 곡의 내적 형식을 파악하기에는 훈련되지 않은 일반 청자의 곡 해석능력 내지 기억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외적인 문제라면 작품이 작곡자가 엄격하게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연주되기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상의 문제점은 물론 잠시 후 언급하게 될 음향(Klangfarbe)에 대한 관심 즉 음향작곡(Klangkomposition)경향의 대두, 그리고 그 외에도 추후에 예를 들어 존 케이지를 위시한 우연성의 탐구라든지 혹은 반대 방향에서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가능해진 전자/컴퓨터 음악 실험과 같은 또 다른 모색을 촉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윤이상이 유럽에 도착하던 시점 한참 진행 중이던 이와 같은 음렬주의의 퇴조는 작곡자로서 그가 자신의 입장과 방향성을 고민하게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 두번째 계기: 한국 전통의 재발견

윤이상이 봉착하게 되는 또 다른 문제는 보다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뛰어난 작곡자들이 모여있던 당시 유럽음악계에서 어떻게 자신의 입지를 마련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파리를 떠나 베를린에서 보리스 블라허의 지도를 받으면서 비로소 윤이상은 자신 안에 구축하고 있던 음악적 구상에 확신을 지니고 이를 작곡기법 및 음악미학의 두 차원에서 구체화하기 시작합니다.

 

후술하게 될 이와 같은 윤이상의 새로운 음악어법이 유럽무대에서 크게 인정받게 된 중요한 배경은 음렬주의로부터의 이탈현상이 한편으로는 비유럽적 음악전통에 대한 관심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음향작곡 경향의 대두로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윤이상 자신에 고유했던 작곡 스타일이 유럽의 음악사적 요구를 만족시켰을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음악을 뒷받침했던 미학적 입장은 역시 후술하듯 음악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 유럽 음악전통에 대해서는 –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윤이상, <정중동 – 유럽에서 나의 작곡발전상에 관하여>).

 

1.3. 음향작곡과 윤이상

우선 당시 태동하던 음향작곡이란 무엇인지 잠시 짚어보겠습니다. 윤이상 본인도 지적하다시피 일반적으로 말해 서양음악사는 기원전 3세기경 정확한 음정을 낼 수 있는 Wasserorgel의 발명 이후 이른바 ‚순수한 음(der reine Ton)’을 기본 단위로 하여 음악의 내용과 형식을 다듬어왔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윤이상, <나의 음악에 대해(Über meine Musik)>, 1993년 잘츠부르크 예술대 ‚모차르테움’ 강연록). 초점을 바꾸어 말하자면 음향작곡 경향이 대두되기 이전에 음향 즉 ‚소리’의 문제는 화음과 멜로디 그리고 리듬 및 강약(다이나믹)에 비하여 부차적인 음악의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고도 하겠습니다. 음향은 순수한 음으로 추상화됩니다. 이 순수한 음들을 동시에 쌓아 올려 화음이라는 음들 간의 수직적 관계가, 그리고 이들을 시간적인 선후로 배치하여 수평적 관계인 멜로디가 만들어집니다. 음향의 문제는 악기 혹은 성부간에 상이한 ‚음색’이 다성음악적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형태로서만 중요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음향작곡이 음악에 있어 음향을 그 중심문제로 놓은 것의 의미를 음악사적으로 평가할 만 합니다. 음렬주의 기법이 조성음악이라는 서양음악전통의 거대한 전제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음향작곡 기법도 최소한 20세기 초까지 서양음악에서 의문시 되지 않았던 ‚순수한 음으로 이루어진 얼개의 구축’이라는 음악적 이념을 결정적으로 상대화시키는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여기서 음향작곡에 있어 핵심적인 인물인 리게티와 펜데레츠키의 대표적인 작품 두 곡의 시작부분을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CD]

리게티, 아트모스페레 (Atmosphères. 1961) (발췌)

[CD]

펜데레츠키, 폴리모르피아 (Polymorphia für 48 Streichinstrumente. 1961) (발췌)

 

그러나 음향작곡도 곧 또 다른 과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소리를 얻기 위해 리게티 등은 음을 수직적으로(음높이) 그리고 수평적으로(음의 장단) 잘게 자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얻어진 소위 미분적 음향을 다시 모아 거대한 음의 덩어리(음괴, 클러스터)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음 덩어리 혹은 음장(音場, musikalische Felder)은 이안니스 크제나키스(Iannis Xenakis)의 작품명 Metastasis(1954)가 이미 예고하였듯 마치 제자리에 서 있는 듯한(stehende Klänge) 인상을 줍니다. 주제를 제시하고 전개하고 변주하는 방식으로 선형적으로 전진하던 서양음악에 이와 같은 정적인 특성을 부여한 것을 이들의 음악적 성취로 인정한다면, 반면에 한 곳에 머물러있는 음 덩어리를 조성음악적 논리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조직하고 움직일 것인가라는 새로운 과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가철학의 ‚정중동(靜中動)’ 사상에 그 미학적 바탕을 둔 윤이상의 음악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당대의 음악적 흐름에 화답하였을 뿐 아니라(Hans Oesch, <Musik aus dem Geiste des Tao>, 18~19쪽) 70년대 음향작곡경향이 퇴조하는 것과 무관하게 일관되게 그 깊이와 폭을 더하게 됩니다.

 

1.4. 윤이상 음악의 독자성: 주요음 및 주요음향기법

윤이상의 음악이 음향작곡경향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그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를 뒷받침하는 일관된 미학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음향작곡에서는 개별음을 미분하고 다시 적분하는 과정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볼 때 음향작곡에서도 미분된 음소는 작품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음악 자체와는 구별되는 그리고 그 자체로는 아직 불완전한 구성요소로 머물고 있습니다. 이점은 음향작곡이 극복하려던 이전 서양음악에서 ‚순수한 음’이 부차적인 지위로 만족해야 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반면 윤이상의 미학에서 개별음은 전혀 상이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닙니다. 개별음은 전체 음의 부속이기는커녕 오히려 음악 자체와 떼어서 구분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것이라고 까지 하겠습니다. 음은 또한 하나의 존재자로서 세계의 질서 혹은 진리, 즉 도가철학에서 말하는 도(道)를 나누고 함께 표현한다고 이해됩니다. 윤이상은 주요음(Hauptton) 그리고 주요음향(Hauptklang)이라는 작곡기법 상의 용어에 이와 같은 자신의 미학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작곡자 자신의 설명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이하 윤이상, <정 중 동 (靜中動) - 유럽에서 나의 작곡발전상에 관하여. Tübingen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수여식에서 한 강연>(1985)에서 인용]

제가 저의 작곡기법에서 작은 규모의 편성을 위해서는 “주요음(Haupt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반면에 오케스트라 작품의 음향조직에 한해서는 “주요음향(Haupkklang)”이라고 말하는 데 대하여 음악학자들은 자주 이것이 애매하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는 분명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요음기법 (Haupttontechnik)” 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의 작곡기법에서 이 주요음기법이 동아시아의 음악언어가 유럽의 전위음악의 그것과 융합되어가는 과정의 바로 그 중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요음향기법(Hauptklangtechnik)”은 제가 60년대 초반부터 개척해 왔습니다. 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것이 좀 더 쉽게 파악되고,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되도록 점차 수정되어 갔습니다. Christian Martin Schmidt가 정확히 파악했듯이 “주요음기법”의 개념은 하나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저의 음악언어의 기본이 되는 것이며 또한 저의 작곡기법의 보편적인 원칙입니다. 이 작곡기법은 그 근원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음향관념(Klangvorstellung)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 아시아적인 원칙이 그 형태를 얻을 때에는 바로 유럽적인 무조음악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중국과 한국의 고전음악은 원칙적으로 단음적이며, 그의 음악적인 흐름은 선() 적입니다. 아시아의 음악적 미학은 주로 5개의 주요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5개의 음은 언어가 되기 위해 하나 하나의 음으로 고립되어서 다른 음들과 함께 음의 연속으로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음은 처음 시작에서부터 사라질 때까지 변화의 법칙에 일관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도가에서 말하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전타음(前打音), 음의 순간적 장식, 미끄러짐, 음군의 동요 그리고 음색의 뉘앙스와 다이너믹은 음과 양의 원칙이 정() 내지 동()의 상관 관계 원칙으로써 작용하는 과정 중의 한 부분입니다. 도가적인 변화의 개념은 항구적인 변형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각개의 음은 음을 내기 시작하자마자 이미 그 속에 자신의 진행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이 전개됨으로써 언어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소우주로써의 부분은 전체를 즉 대우주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제가 유럽에서 처음 몇 년간 12음기법으로 작곡하며 저 자신의 언어를 찾고 있는 가운데, 이 유럽의 다성음악적 체계가 저에게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12음을 단순히 서로 연관시키는 것으로는 저 자신의 표현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에게는 단순한 무조(無調)적인 체계에 아시아적인 음향법칙을 끌어들여 작품을 단지 흥미롭게 만든다는 것도 거북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의 방향, 즉 동아시아의 전통을 현대의 그리고 서구의 언어에 이전하는 방향을 취했습니다.

선() 적인 음의 흐름이라는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주요음을 이음성(異音性, Heterophonie)적으로 분열시켜 주요음향 혹은 주요음향군으로 만든다는 것이 별로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인용끝. 번역 - 현경애, 번역 일부수정 - 이진]

 

 

서구인에 대해 자신의 미학을 해명하고자 하는 윤이상의 언어가 특별히 현대음악에 관심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난해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설명의 핵심적인 내용은 한국인이라면 국악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살면서 이미 몸으로 귀로 체득한 경험이 말해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양식 악보에 표기된 대로 아리랑을 연주할 때의 생경함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국악적인 것을 소위 서양음악과 구분시켜주는 특질은 바로 음악에서 소리를 낼 때 하나의 음높이에서 변화없이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음높이가 완만하고도 때론 급하게 변하면서 동시에 음색이 변화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다양한 꺾기와 농현(弄絃)으로 빚어지는 다채로운 음의 변화가 중심에 놓인 음과 자연스럽게 한 몸뚱어리가 되어 후속하는 다른 중심음이 나올 때까지 그 강렬함을 유지합니다.

이상의 예가 윤이상이 주요음기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합니다.

 

한편, 주요음향기법이 달성하고자하는 이음성(헤테로포니)적 효과는 보통 중동이나 아시아의 전통음악에서 발견된다고 일컬어집니다. 예를 들어 민요를 여럿이 함께 부르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그것이 말하는 바를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 대위법적 음악으로 대표되는 다성음악(폴리포니)에서도 여러 악기나 목소리가 동시에 소리를 내지만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성부를 구성해서 건축적인 혹은 입체적인 효과를 달성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음성적 음악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는 악기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음을 연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로디 진행의 속도나 강약 등의 자연스러운 차이 혹은 연주자들의 즉흥적인 장식음 연주로 인해 미묘한 음악적인 효과가 달성되게 됩니다.

 

음 혹은 소리에 대한 파악에 있어 보이는 이와 같은 서양과 동아시아 특히 한국간의 차이를 윤이상은 흔히 펜으로 쓴 글씨와 붓으로 쓴 붓글씨의 비유로서 설명하곤 합니다. 동양출신으로 유럽에서 최초로 주목을 받았으며 지속적인 성공을 거둔 작곡자였던 윤이상은 유럽 등 다른 문화권의 음악인들이 자신의 음악 만이 아니라 동양 및 한국음악에 그리고 그 사상적 배경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윤이상은 한국의 전통음악과 악기를 소개하는 라디오방송 기획물을 통해 이러한 한국의 음악과 미의식을 알리려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1963년 서독일라디오(WDR)의 특집방송에서 소개하기도 했던 기악곡 <상령산>을 잠시 들어보겠습니다(국제윤이상협회 학술지 <씨올>, 2002/3, 13쪽 이하 참조). 이어서 여기서 그가 스스로 자신의 주요음기법이 완성되었다고 평가한 작품 <예악>의 중반부터 종결부까지를 감상하겠습니다.

 

[CD]

정재국, 피리, 상령산 (발췌)

[CD]

윤이상, 예악 (1966) (발췌)

 

 

2. 한국음악(미학) 전통에서 바라본 윤이상의 미학

 

2.1. 윤이상의 음악은 한국적인가?

“윤이상의 음악은 한국적인가요?”   윤이상의 이름에 익숙해진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을 새삼스럽게 묻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윤이상의 음악 그리고 그를 지탱하는 미학의 흐름을 탐구하는 서구 특히 독일 연구자들에게 이 질문은 상당히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로 다가옵니다. 크게 나누어 보자면 이러한 문제제기는 첫째 윤이상이 기대고 있는 한국 궁중음악의 (연주곡과 악기를 포함한) 전통을 특히 중국 궁중음악의 그것에서 얼마나 자율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느냐라는 질문과 관련됩니다. 둘째 윤이상이 말하는 도가철학적 음악미학 역시 동아시아적이라고는 할지언정 과연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39년 그리고 유럽에서 39년을 살았지만 현재 조명되는 대부분의 작업이 후자의 공간과 맥락에서 이루어진 그의 음악은 오히려 서양음악전통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입니다. 그의 음악이 현대 한국의 많은 감상자에게 (서양의 감상자에 비해) 특별히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는 다소 경험적인 논증도 세 번째 논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곰곰이 따져보면 윤이상 음악에 대한 성찰이 결국 “한국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 질문은 이 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윤이상의 개인적 경험을 매개로 ‚식민지지배와 뒤따른 서구화 속에서 전통문화의 변방화 혹은 단절을 경험한 현대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던져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2.2. 서구 윤이상 연구들의 잘못된 전제들

“한국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바로 답하기 전에, 위 세가지 의문에 답하는 서구 연구자들의 논증에 관해 잠시 부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은 연구 결론에서 해당 의문들을 긍정 혹은 기각하는 지의 여부를 떠나 많은 경우 몇 가지의 학문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우선 근대이전 동북아시아의 문화적 지형을 상당부분 단순화해서 파악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궁중음악 및 도가사상의 예를 보자면 그 발생지역이 현재 중국 영토라는 사실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에 자율적인 문화가 아닌 것으로 당연한 듯이 전제되곤 합니다. 이는 동북아시아에서 정신 문화 특히 유/불/선과 같은 고도의 정신문화가 어느 한 민족이나 국가에 귀속되고 지배된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형성된 일종의 공동 문화권 안에서 창조되고 재해석되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윤이상의 예술적 근원을 논의할 때 중요한 중국궁정음악인 당악(唐樂)의 경우 고려사에 의거할 때 적어도 전래 후 적어도 약 1천년 이상, 도가사상의 경우 역시 최소한 1천5백 년을 넘는 장구한 기간 동안 자율적인 발전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동아시아 정신문화 전통의 다층적인 면모가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윤이상 미학의 사상적 뿌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유/불/선의 상이한 흐름들이 마치 모두 그에게로 수렴하는 듯한 잘못된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자면 미학적 입장에 있어 유가의 감계주의(鑑戒主意)가 장자적 예술정신과 다를 뿐 더러(서복관, <중국예술정신> 등) 유가철학 내에서도 상이한 분절점이 무수히 존재합니다. 윤이상의 미학에서 등장하는 도가철학적 음양사상을 단서로 유가 삼경의 하나인 역경(易經, I-Jing)의 팔괘(八卦. Die acht Trigramme)설을 연관하려는 시도도 학문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좀더 거리를 두고 보면 이러한 시도들은 실상 윤이상의 음악이 한국 그리고 나아가 동북아시아 철학/미학 서로 이질적인 전통들의 핵심을 두루 담고 있으리라는 전제 혹은 기대의 소산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점이 남았습니다. 저는 이상의 입장들이 전제로 삼는 소위 ‚순수한 한국문화’라는 개념이 지닌 위험성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제3제국하의 독일에서 보았듯 이러한 자민족 문화에 대한 순혈(純血)주의적 입장은 폭력적인 배타성을 그 안에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비단 타민족 문화에 대한 배타적 시각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공동의 문화적 시공간에서 만들어진 문화적 산물까지도 배척당하게 될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풍부한 문화적 전통이 정치, 종교적 혹은 인종주의적인 취사선택에 의해 빈약한 것으로 전락할 위험이 뒤따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문화전통 형성에 대한 충분한 학문적 고려가 없는 채 던지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쉽사리 한국 문화에 대한 이상의 ‚형식적’ 정의(定義)에 대한 논의로 변질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3. 윤이상 음악의 한국적 특질: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운 놀이

그러나 윤이상의 음악이 한국적이기 위해서 위와 같이 전통이라고 여겨지는 틀에 형식적으로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근거는 한국 미학사상의 흐름이 한 예술가의 세계에 포섭될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 한국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은 정신사적으로 혹은 내용적으로 부합하는 답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다라고 이 짧은 발표에서 일반적으로 정의 내리려는 것은 허황된 시도일 것입니다. 저는 다만 윤이상의 도가적 음악미학이 그리고 그가 미학을 형성하는 방식 자체가 한국 미학사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특징 한가지를 드러내준다는 것을 지적하려 합니다.

 

이 특징은 바로 ‚경계를 허물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한국적인 미의식에서 너와 나, 안과 밖, 예술과 일상과 같은 경계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즐겁고도 감동적으로 허물어집니다. 탈춤에서 또 판소리에서 연주자와 공연을 즐기는 사람 간에 추임새와 환호성이, 한숨과 탄식이 자연스럽게 오고 갑니다. 성스러움과 인간 냄새가 함께 미소 속에 함께 담긴 불상들에도, 박물관에 모셔두기에도 그렇다고 술을 담기에도 난처한 정감 어린 조선백자에도 어떤 획일적인 경계란 남아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이곳 베를린 근교 마아찬에 조성된 ‚서울정원’에서도 이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옆 일본 정원이 입구에 높은 정원수를 심어 출입자의 시야를 가리고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드는 등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정제되고 닫혀있는 세계로서의 인공미를 뽐낸다면, 중국 정원은 언덕 바위를 깎아 시 한 수를 붉게 새겨두는 호방한 멋을 보여줍니다. 이에 비해 한국식 정원은 두드러지게 쌓아 올리고 깎아 내린 것이 없어 언뜻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정자 아래로 흐르도록 어쩔 수 없다는 듯 시내 하나를 조성해놓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미 자연에 있는 좋은 시냇가를 찾아 그곳 풍광에 어울리도록 정자 한 칸을 놓는 것이야말로 한국적 정원의 미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담 사이 대문을 들어서서 걸음을 옮기면 마당 안에서도 저편 살짝 열어놓은 정자 창 밖으로 흐르는 시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와 같이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경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경계를 자유롭게 열고 닫는 놀이를 가리킵니다.

 

앞으로 더욱 살펴보겠지만 윤이상의 음악 및 미학은 한국적 미의식의 중요한 속성을 담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형성과정에 있어서 그는 전통음악과 서양현대음악의 문제를 심층에서부터 독자적인 시각으로 파악하여 또 다른 새로운 예술로 창조하였습니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경계를 허물기’라는 미적 이념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보입니다. 이점을 오늘 발표의 마지막 논점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앞 절에서 적었듯 윤이상의 주요음기법은 음악에 대한 도가철학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도가철학에서 비록 음(陰)과 양(陽)의 상호작용을 말하지만 그 근본은 일원론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 만물이 서로 활발하게 상호 작용을 주고 받고 서로 간 위치와 역할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체는 도(道)라고 불리는 그러나 특정될 수 없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 모두 포함됩니다. 윤이상은 이러한 세계의 일원성 안에 다원성이 결합된 모습을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도가적 이미지를 음악으로 표현하려 노력합니다. 그러한 그에게 고구려 후기에 만들어진 강서고분(6세기 말~7세기 초)의 사신도(四神圖)는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사진]

강서고분 대묘 사신도 중 백호도


 

[DVD]

강서고분 대묘 들어가는 장면

 

[CD]

윤이상. <플루트와 오보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마쥬> (1968) (발췌)

 

사신도는 다른 어떤 인접국보다도 유독 고구려에서 고분벽화(Grab Freskomalerei)의 소재로 유행했던 것으로 당대의 도교적 내세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서고분의 사신도는 수세기에 걸쳐있는 많은 고분벽화들 가운데에서도 벽면에 직접 물감을 먹여 선명한 색채의 대비를 이루고 신화적 신물(神物)에 극도의 사실성을 부여하는 등 그 중 단연 뛰어난 예술적 성취도를 보여줍니다. 특히 강서고분 서쪽 신 백호도는 윤이상에 있어 도가적 세계관이 예술로서 성취된 선례와 다름없었습니다. 강서고분 중 ‚중묘’에서 발견된 백호도의 복사본을 베를린 자택에 두고 항상 지켜보던 그의 경외심은 (추후 동베를린 사건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1963년 북한 방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강서고분 ‚대묘’에서 직접 대면한 백호도에서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받습니다. 당시 체험을 윤이상은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림을, 서로 그 안으로 흐르듯 빨려 들어가는 선들을 바라보았다 – 네 종류의 신(神)들, 청룡, 백호, 주작 그리고 현무를. 그들은 저 안장된 왕을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지키고 있었다. 다른 벽면에는 각각 한가지의 동물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던 반면, 유독 서쪽 벽면에는 이 모든 네 종류의 보호신이 한꺼번에 얽혀진 채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동물 넷인 것인지 아니면 하나로 된 것인지 분간하기란 힘들었다. 그럴 정도로 완벽하게 융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여기에서 보아낼지는 오로지 바라보는 이의 시점에 달려있다 – 또한 그가 움직일 때면 그림도 함께 움직이고 색이 변화하며, 그야말로 놀랍게도 표현에 있어 그림 스스로가 자신을 완성하게 된다. 이야말로 음악적인 것이며, 나는 바로 이 이미지로 곡을 써내려 갔다. 이는 도가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 네 종류의 신물(神物) – 우리는 순전히 개별적인 부분들과 순전히 세세한 것들만을 볼 뿐이지만, 그러나 바로 그 안에서 거대한 세계가 구성된다. 그러하여 도가적 예술에서 통일성이란 중심에 놓이며, 통일성은 다원성에 다원성은 통일성으로 녹아 들어간다.” (윤이상, <나의 음악에 대해 (Über meine Musik)> 302~3쪽. 독어원문을 번역)

 

이와 같이 개체간에 경계가 소멸하면서 도가 현현하는 이미지를 그는 한국에 납치된 후 옥중에 있으면서도 플루트와 오보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네 악기를 위한 <이마쥬>(1968)에서 음악적으로 형상화시킵니다. 최초에 네 악기는 각각 현무, 청룡, 주작 및 백호를 상징하지만 강서고분 사신도에서와 같이 곧 서로 역할을 바꾸고 서로 안으로 자연스럽게 융해되면서 도가철학의 이상적 세계관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윤이상의 음악은 시공간적으로 상이한 전통들간의 갈등 속에서 이를 창조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으로 이해되며, 그 음악이 근거하고 있는 도가적 미학사상은 여전히 엄존하고 있는 이러한 갈등 속에 처해있는 한국인 그리고 한국문화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윤이상의 작품 한 곡을 그가 재직했었던 베를린 예술대학(UdK) 출신의 리코더주자 오진우씨의 연주로 들어보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주]

 

곡목: 윤이상, 리코더를 위한 <중국의 그림> (1993) 중 제1곡 “인적없는 초옥의 방문객”

연주자: 오진우 (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 리코더)

Theme: Shocking Blue Green. Blog at WordPress.com.

Follow

Get every new post delivered to your In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