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a dream

September 27, 2009

발터 벤야민, “즐거움과 고통”

Filed under: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 yheejean @ 7:51 pm

발터 벤야민의 유고 중 “정신-신체 문제에 대한 도식(Schemata zum Psychophysischen Problem)”에서 발췌번역. (GS VI. S. 80 – 81)

 

(아래의 번역은 계속 수정되고 있으므로 다른 곳으로의 인용이나 복사는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번역에 대한 좋은 지적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 이진)

 

V. 즐거움(Lust, 쾌락)과 고통(Schmerz)

 

즐거움과 고통의 신체적(physisch) 차이점들 속에 양자의 형이상학적(metaphysisch) 차이점이 포함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 신체적 차이점들 중에서 최종적으로는 기본적이자 비환원적인 두 가지가 남겨진다. 즉 즐거움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다는 것과 또 동일한 형태를 지닌다는 것, 이상의 즐거움의 [두 가지] 특성이 그것인데 바로 이를 통해 즐거움이 고통과 구별된다. 고통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고통은 만성적이면서 다양한 형태를 지녔다는 특성을 통해 즐거움과 구별된다. 오직 고통 만이 [신체]기관의 상시적인 활동에 만성적으로 동반한다고 느껴질 수 있는 반면, 즐거움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직 고통 만이 과연 어떤 기관으로부터 고통이 생기는지를 매우 세밀하게 가려낼 수 있는 반면, 즐거움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사정은 언어에서도 드러나는데, 즉 독일어에서 즐거움의 최대치는 단지 단 것(甘, Süßen)이나 희열(Wonne)에 대한 두 가지 최상급만으로 표현되고, 그 중에서도 단지 전자만이 전적으로 원래부터 또 명백하게 [한 종류의] 감각[기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가장 하급의 감각기관인 미각(味覺)이 긍정적인 감관(感官, Organ)의 느낌을 가질 경우에 대한 [언어적] 기술(記述, Bezeichnung)이 여타 감각기관들을 통한 쾌락 전부에 대여(貸與)되었다고 하겠다. 고통에 대한 기술들은 이와 전혀 사정이 다르다. 다음과 같은 낱말들, 즉 고통(Schmerz), 아픔(Weh), 괴로움(Qual), 수난(受難, Leiden)의 모든 단어에, 즐거움에 대한 언어적 기술의 영역 안에서는 그저 단지 ‘희열’이라는 낱말에서나 언뜻 드러나고 있을 뿐인 다음과 같은 특징, 즉 고통 속에서 어떠한 은유법도 필요 없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혼(das Seelische)이 감성적인 것(das Sinnliche: 감성은 여기에서 감관을 포함한 넓은 개념으로 사용된다 – 역주)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이 점은 고통은 즐거움을 훨씬 상회하는 높은 정도로 더욱 실감나게(echter) 체험된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 때문에, [고통은] 단지 그 정도에 있어서만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전적으로 분명한 것은, 인간의 전() 존재에 이와 같은 고통의 느낌이 행사하는 부단한 영향력과 고통이 지닌 항구성(Permanenz)이라는 능력 간에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항구성은 다시 저 신체적인 차이점들에 정확히 상응할 뿐 아니라 그[신체적인 차이점]를 해명하는 두 감응[즐거움과 고통 - 역주] 간의 형이상학적 차이점들의 영역으로 [우리를] 직접적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신체적 고통이건 형이상학적 고통이건 간에 고통의 감정만이 끊기지 않고 지속될 수 있으며 동일한 주제로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고통에 관한 가장 완성된 형태의 도구(Instrument)이다; 오직 인간의 수난(Leiden) 안에서 고통의 가장 순수하고 적합한(adäquaten, 충일한) 형태가 드러나며, 오로지 인간의 삶 속으로 고통은 흘러 들어간다(mündet). 모든 신체적 느낌[감응] 중에 단지 고통 만이 인간에 있어 마치 배로 저어갈 수 있는 부단히 흐르는 강과 같으며, 이 강은 인간을 바다로 이끈다. [하지만] 즐거움의 요구에 상응하고자 인간이 노력할 때마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고통이 세계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과는 달리, 참으로 즐거움은 바로 다른 세계의 전조(前兆)가 된다. 그러므로 신체적 즐거움은 간헐적인 반면, 고통은 항구적일 수 있다.

 

즐거움과 고통의 이러한 관계는 다음의 측면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어떤 인간의 본질을 인식하는데 있어 무엇이 그의 가장 큰 고통의 계기가 되는지는 큰 상관이 없지만, 그 반면 무엇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의 계기가 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 다시 말해 가장 무의미할 정도로 경미한 고통 까지도 고도로 종교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데 반해, 즐거움은 [사후적으로]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 고귀함을 [즐거움 자체의] 발생이라는 축복에서, 더 정확히는 그 [즐거움을 가져온] 계기에서 얻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정: 200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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