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a dream

September 30, 2009

발터 벤야민, “칸트 윤리학에 대해”

Filed under: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 yheejean @ 1:24 pm

발터 벤야민의 유고 중 “칸트 윤리학에 대해” 번역. (GS VI. S. 55)

 

(아래의 번역은 계속 수정되고 있으므로 다른 곳으로의 인용이나 복사는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번역에 대한 좋은 지적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 이진)

 

<36번째 단편>

나(Ich)의 창발성(Spontaneität)과 개인의 자유는 전혀 다르다. 자유의지의 질문은 빈번히 이 창발성[의 차원]과 잘못 결부되곤 하는데, 그 때문에 마치 [전적인] 사고 작용의 자유 혹은 순전히 신체적인 행동의 자유 문제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오직 그의 행위와 결부될 때만 비로소 ‚자유롭다’고 여겨질 수 있다. ‚나’의 창발성에 대한 질문은 전혀 다른 (생물학적인? “biologisch?”) 맥락에 속한다.

 

[마지막 수정: 2009.09.29.]

September 27, 2009

발터 벤야민, “즐거움과 고통”

Filed under: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 yheejean @ 7:51 pm

발터 벤야민의 유고 중 “정신-신체 문제에 대한 도식(Schemata zum Psychophysischen Problem)”에서 발췌번역. (GS VI. S. 80 – 81)

 

(아래의 번역은 계속 수정되고 있으므로 다른 곳으로의 인용이나 복사는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번역에 대한 좋은 지적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 이진)

 

V. 즐거움(Lust, 쾌락)과 고통(Schmerz)

 

즐거움과 고통의 신체적(physisch) 차이점들 속에 양자의 형이상학적(metaphysisch) 차이점이 포함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 신체적 차이점들 중에서 최종적으로는 기본적이자 비환원적인 두 가지가 남겨진다. 즉 즐거움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다는 것과 또 동일한 형태를 지닌다는 것, 이상의 즐거움의 [두 가지] 특성이 그것인데 바로 이를 통해 즐거움이 고통과 구별된다. 고통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고통은 만성적이면서 다양한 형태를 지녔다는 특성을 통해 즐거움과 구별된다. 오직 고통 만이 [신체]기관의 상시적인 활동에 만성적으로 동반한다고 느껴질 수 있는 반면, 즐거움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직 고통 만이 과연 어떤 기관으로부터 고통이 생기는지를 매우 세밀하게 가려낼 수 있는 반면, 즐거움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사정은 언어에서도 드러나는데, 즉 독일어에서 즐거움의 최대치는 단지 단 것(甘, Süßen)이나 희열(Wonne)에 대한 두 가지 최상급만으로 표현되고, 그 중에서도 단지 전자만이 전적으로 원래부터 또 명백하게 [한 종류의] 감각[기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가장 하급의 감각기관인 미각(味覺)이 긍정적인 감관(感官, Organ)의 느낌을 가질 경우에 대한 [언어적] 기술(記述, Bezeichnung)이 여타 감각기관들을 통한 쾌락 전부에 대여(貸與)되었다고 하겠다. 고통에 대한 기술들은 이와 전혀 사정이 다르다. 다음과 같은 낱말들, 즉 고통(Schmerz), 아픔(Weh), 괴로움(Qual), 수난(受難, Leiden)의 모든 단어에, 즐거움에 대한 언어적 기술의 영역 안에서는 그저 단지 ‘희열’이라는 낱말에서나 언뜻 드러나고 있을 뿐인 다음과 같은 특징, 즉 고통 속에서 어떠한 은유법도 필요 없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혼(das Seelische)이 감성적인 것(das Sinnliche: 감성은 여기에서 감관을 포함한 넓은 개념으로 사용된다 – 역주)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이 점은 고통은 즐거움을 훨씬 상회하는 높은 정도로 더욱 실감나게(echter) 체험된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 때문에, [고통은] 단지 그 정도에 있어서만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전적으로 분명한 것은, 인간의 전() 존재에 이와 같은 고통의 느낌이 행사하는 부단한 영향력과 고통이 지닌 항구성(Permanenz)이라는 능력 간에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항구성은 다시 저 신체적인 차이점들에 정확히 상응할 뿐 아니라 그[신체적인 차이점]를 해명하는 두 감응[즐거움과 고통 - 역주] 간의 형이상학적 차이점들의 영역으로 [우리를] 직접적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신체적 고통이건 형이상학적 고통이건 간에 고통의 감정만이 끊기지 않고 지속될 수 있으며 동일한 주제로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고통에 관한 가장 완성된 형태의 도구(Instrument)이다; 오직 인간의 수난(Leiden) 안에서 고통의 가장 순수하고 적합한(adäquaten, 충일한) 형태가 드러나며, 오로지 인간의 삶 속으로 고통은 흘러 들어간다(mündet). 모든 신체적 느낌[감응] 중에 단지 고통 만이 인간에 있어 마치 배로 저어갈 수 있는 부단히 흐르는 강과 같으며, 이 강은 인간을 바다로 이끈다. [하지만] 즐거움의 요구에 상응하고자 인간이 노력할 때마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고통이 세계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과는 달리, 참으로 즐거움은 바로 다른 세계의 전조(前兆)가 된다. 그러므로 신체적 즐거움은 간헐적인 반면, 고통은 항구적일 수 있다.

 

즐거움과 고통의 이러한 관계는 다음의 측면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어떤 인간의 본질을 인식하는데 있어 무엇이 그의 가장 큰 고통의 계기가 되는지는 큰 상관이 없지만, 그 반면 무엇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의 계기가 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 다시 말해 가장 무의미할 정도로 경미한 고통 까지도 고도로 종교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데 반해, 즐거움은 [사후적으로]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 고귀함을 [즐거움 자체의] 발생이라는 축복에서, 더 정확히는 그 [즐거움을 가져온] 계기에서 얻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정: 2009.09.27.]

심비안 스마트폰에서 유니코드 출력 방법 (한글 및 유럽특수문자 동시출력)

Filed under: 인터넷 — yheejean @ 12:20 pm

심비안 운영체제인 스마트폰에서 한글과 유럽어의 특수한 문자(독일어 움라우트나 프랑스어의 악상 등)를 동시에 출력하려면 다음과 같은 추가 설정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유니코드를 지원하는 글꼴(폰트)을 준비하고
글꼴의 이름을 변경한 후 스마트폰의 특정 폴더에 복사해주어야 합니다.

 

1. 먼저 글꼴의 경우
1) (한글 및 기타 언어의 동시 출력을 위해) 유니코드가 지원되면서도
2) 글꼴 너비 및 높이가 유럽글꼴과 잘 어울리는지의
두 가지가 관건이더군요. 후자는 단말기의 화면 해상도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나오는 듯싶습니다.


* 노키아 N79에서는 (윈도우 비스타 등에 포함된) ‘맑은고딕’ 글꼴도 괜찮았지만,

라틴어알파벳과 한글간의 시각적 조화라는 점에서 공개글꼴인 ‘은진체’가 특히 좋았습니다.

개발자주소는 http://packages.debian.org/unstable/x11/ttf-alee 입니다.

* 노키아 5800에서는 아래 링크에서 받으실 수 있는 ‘은 바탕체’(Un Batang)
글꼴도 위 ‘은진체’만큼 좋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아래아한글 내장 글꼴도 나름 볼만 합니다.)

은 바탕 글꼴 링크:
http://ko.cooltext.com/Download-Font-%ec%9d%80+%eb%b0%94%ed%83%95+Un+Batang

글꼴 개발자 홈페이지:
http://kldp.org/node/90361

 

2. 글꼴의 이름 변경 및 복사
글꼴이 준비되었으면
파일 이름을 아래의 설명에 따라 변경한 후 메모리카드의 \resource\FONTS 폴더에 글꼴을 복사하시면 됩니다.

그 방법을 자세히 적겠습니다.

폴더가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경우 스마트폰을 대용량 저장장치(mass storage) 모드로 컴퓨터와 연결하거나
메모리리더기를 통해 메모리카드를 컴퓨터와 연결한 후 Font 폴더를 새로 만듭니다.

 

그 다음 준비한 글꼴을 복사하여 총 4개로 만든 후 각각의 파일명을 아래와 같이 4개의 상이한 이름으로 변경하여 위의 Font 폴더에 복사합니다.

 

기본 폰트, 볼드 폰트, 제목볼드, 숫자폰트에 해당하는 네 가지 파일명은
심비안 운영체제의 버전에 따라 상이한데,

 

S60 3rd의 경우는
NOSNR60.ttf, NSSB60.ttf, NSTSB60.ttf, S60ZDIGI.ttf

S60 5th의 경우는
s60snr.ttf, s60ssb.ttf, s60tsb.ttf, S60ZDIGI.ttf

위와 같이 변경하시면 됩니다.

 

[마지막 수정: 2009년 9월 17일]

외국어 남용 현상과 모국어의 생산력 소멸

Filed under: 인터넷 — yheejean @ 12:19 pm

갈수록 빈번해지는 외국어 남용 현상을 소위 ‘언어적 순혈주의’의 입장에서 쉽사리 비판하기 이전에, 동 현상에서 엿보이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이란의 핵문제에 대한 다음 기사를 보자.

“미 정보당국은 영국, 프랑스의 카운터파트와 정보교환 등을 통해 올해 여름에는 이란의 새로운 시설이 내년 가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와 관련, 미국 외교가에서는 오바마 정부가 이란의 추가 핵시설 의혹을 공개함으로써 앞으로 이란과의 협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레버리지‘를 하나 잃게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 정부 입장에서는 이런 정보를 계속 공개하지 않은 채 이란과의 협상에 들어갔을 때 “너희들이 비평화적 핵개발 중단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다그쳐 이란를 수세로 몰아붙일 수 있는 유리한 카드가 소멸됐기 때문이다.”

(이상 2009/09/27 일자, 연합뉴스, 기사제목 < `이란 先手‘에 우라늄농축 정보 공개>에서 인용.)

 

국제정치면의 기사라서 외국어를 당연하다는 듯 사용한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는 중앙일보 연예-문화면 기사를 보자.

 

기사의 서두에 붙는 문구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에서부터, ‘결정권자’를 뜻하는 ‘디시전메이커’라는 외국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같은 기사의 본문을 보면

“눈물 코드로도 세 영화 중 뒤처지지 않는다. 평소의 마이너이미지 대신 대중영화를 택한 최강희나 오랜만에 스크린에 선 김영애의 조합도 무난하다.”

“영화는 ‘애자’란 제목처럼, 혹은 애자란 이름 그 자체처럼 적당히 ‘올드‘하다”

패셔니스타 이미지가 강했던 최강희”

등의 대목들에서 계속 ‘일견 불필요해 보이는’ 외국어의 사용이 눈에 띈다. 붉은 글씨로 바꾸어 놓은 단어들은 분명 외국어 – 정확히는 영어의 음차표기 – 이지 이미 긴 기간 동안 고유어와 더불어 쓰여 언중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외래어(‘카드‘=패, ‘이미지‘=상像의 예가 그러하다)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던져본다. 위 필자들뿐만 아니라, 현재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 외국어를 무의식적으로 섞어 쓰고 있는 우리 모두가 글을 쓰고 단어를 선택하는 사고 과정 속에 있어 외국어의 사용은 과연 ‘불필요한’ 수준에서, 다시 말해 ‘더욱 적절하고 쉬운 단어를 바로 생각해낼 수 있었음에도’ 불필요하게 이루어 진 것에 불과할까? 과연 우리는 현재 우리말과 글로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가?

 

* * *

 

외국어의 남용 현상은 모국어가 지닌 언어적 생산력의 상실에서 비롯할 뿐 만 아니라 후자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1) 한국어로 스스로 생각하고 (2)그 스스로 생각한 것을 다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에게 적절하게 모국어로 표현하고 (3) 마지막으로 다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그 표현된 내용을 이해하는, 이상 세 단계로 이루어진 언어적 사고 및 의사소통의 모든 차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상황인데, 이를 어떻게 심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의 사고와 표현이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일반적 견해를 잠정적으로나마 대전제로 삼을 경우,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그 언어로 자신이 뜻하는 바를 다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으로 적절히 파악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는 세계와 마주한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감성을 통해서는 이미지로 지성을 통해서는 개념으로 만들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근본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종국에는 모국어로 사고할 수 밖에 없다. 외국어의 남용은 모국어를 통한 주체적인 생각에 문제를 야기한다.

서양정신사의 전통이 유럽의 일반인이 쓰는 언어와 긴밀히 맺고 있는 관계 혹은 유럽의 일반인이 서양정신사의 전통에 의외로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있다’라는 말과 ‘떠올리다’라는 말에서 ‘존재’와 ‘표상’에 대한 철학을, ‘옳다’라는 말에서 ‘법’과 ‘도덕’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켜온 배경을 볼 때 비로소 온전히 해명된다.

 

한국의 사상적 전통의 주류는 안타깝게도 이와는 다른 사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혹은 어쩌면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와 (현대보다 훨씬 더) 현격히 구별되었을 한문으로 사유되었기에 한국의 사상적 전통의 주된 흐름 속에서 민초들은 이론의 대상이었을지언정 그 주체가 되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서 유불선이 긴 세월을 거치며 일반의 풍속과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이나 무속적 전통이 반대로 전자에 미친 영향을 전적으로 도외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 무엇으로 불렸건 ‘민초’ 혹은 ‘백성’ 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자율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재 발굴하는 것이 한국어를 쓰고 그에서 더 깊은 사유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또 다른 과제임은 분명하다. 한편 한국 내부의 ‘언어적 장벽’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던 한문고전들이 현재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새롭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 역시 환영할 일이다. )

 

그리고 이렇게 언중(言衆) 전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만들고 사용하지 못했기에 현학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그리고 그 지식을 평가하는 과거제도를 통해 신분질서를 강화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던) 한국의 사상적 전통 조차도, 지난 세기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우리에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언문’이 한글로 재발견되기가 무섭게, ‘철학’이라는 단어를 위시한 일본식 개념들이 한국인의 사유체계를 다시 점거하면서, 심지어 우리는 우리가 ‘지혜를 찾는’, 즉 ‘철학하다’(φλοσοφειν, philosophieren)라는 이론에 있어 근본적인 차원의 개념이자 그것이 표현하는 사태를 우리말로 스스로 ‘사유할’ 기회 조차 박탈당했다. 그 다른 예를 ‘존재’, ‘미학’ 등의 여타 개념 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혹자는 라틴어를 쓴 로마인들도 고전그리스어의 개념들을 번역하여 사용하였고, 이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 등도 라틴어의 개념들을 또다시 차용해서 썼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유럽어에서 쓰이는 개념들의 역사, 즉 그 개념사를 추적해보면 얼마나 긴 시간을 거쳐 많은 토론 속과 다양하게 제안된 번역어 간의 경쟁 속에서 현재의 개념어들이 살아남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한 예로 17세기에 살았던 근대 독일의 사상가 체젠Phillipp von Zesen은 수동적 열정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시오passio의 번역어로 라이덴샤프트Leidenschaft라는 신조어를, 순간을 뜻하는 모멘트moment에 대해서는 ‘눈깜짝할 사이’Augenblick를, ‘앞으로 던진 것’을 의미하는 프로이엑툼proiectum에 대해서는 ‘기획’Entwurf 등의 역어를 성공적으로 제안하지만, 그가 종교Religion의 번역어로 제안한 신성함Gottestum이나 식물학자Botaniker에 상응할 ‘풀을 묘사하는 이’Krautbeschreiber 등은 실제로 쓰이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전통적 학문과 기술 및 과학의 영역 만이 아니라 대중매체와 대중의 생활 언어 속에서, 추상적일 수 있는 ‘개념’보다 더욱 삶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할 ‘이미지’에 대한 적절한 표현조차도 모국어로 생각해내지 못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를 그저 ‘쿨’하고나 ‘쉬크’하거나 ‘올드’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언어는 세상의 단순한 반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이미지가 창조된다는 점(이 측면을 언어의 생산력이라고 표현했다)을 생각할 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우리는 앞으로 세계와 자신의 관계에 있어 점점 더 수동적이고 소비적인 모습을 띄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에서, (언어가 생산적일 때 비로소 가능한) 자율적인 학문이 성립되지 못하며, 그에 따라 학문이 일반의 삶에 호소력을 잃어 외면을 받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책을 읽지 않는 풍조와 깊이 없이 선정적인 매체로 말미암아 이러한 악순환은 가속화되는데, 그 가운데 삶과 세계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야 될 자리에 남이 다른 언어로 대신 고민했던 것과 심지어 그들의 결론까지 차용된다.

 

 

이러한 상황이 불러오는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의 생각이나 정보를 널리 공유할 의도를 갖고 있느냐와는 무관하게) 외국어의 남용 자체가 아직까지는 다수자인 일반 대중들에 대한 소수자(“마이너리티”)의 부당한 정보독점을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가 설령 “레버리지”(지렛대, 수단)나 “마이너” (소수의, 소수자적인)라는 단어를 이해한다고 할 경우에도, 그 역시 병원의 환자나 미술관 관람객의 입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 없이 ‘디아이시’(DIC, 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나 ‘멜랑콜리아 엑스 콜레라 니그라’(melancholia ex cholera nigra)라는 단어를 접할 경우 난색을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도 파악하지 못하며, 기껏 미술관을 찾고서도 뒤러의 판화에 담긴 서양정신사적 맥락을 이해할 기회를 빼앗긴다. [참고로 두 용어는 각각 '범발성 혈관내 응고증' 및 서양 4체액설의 용어인 '검은 담즙질에서 비롯하는 우울증'을 뜻한다.]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에 대한 정보가 소수의 지식 독점층 간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 형태로 전달될 경우 그야말로 자칭 결정권자들(“디시전메이커”) 만이 당면 문제에 대해 정보를 전유할 뿐 아니라 그에 관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 *

 

이렇게 볼 때, 외국어 남용의 문제는 특정 표준어기관이나 언어순혈주의자, 혹은 언어단체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전문영역에서는 전문인이자 다른 영역에서는 대중 일반에 속하는) 모두의 문제이다. 즉, 학술적 번역의 영역에서뿐 만이 아니라[고전그리스어의 파스헤인πάσχειν, 라틴어의 파티pati, 독일어의 라이덴leiden을 최근 우리말의 '겪기' 및 '겪음'으로 옮긴 최근 한 고전학자의 시도는 이러한 점에서 특히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소위 ‘기술번역’으로 불리는 상업적 번역(컴퓨터 운영체제 및 프로그램의 명령어들의 번역도 이에 해당한다), 외국의 새로운 기사를 소개하는 언론 및 일반 블로그 사용자의 글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외국어 남용의 이면에는 외국어가 지시하는 현상을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전문적 역량의 결여, 혹은 나태함이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문제를 가속화시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대중들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 대안을 다양하고도 개별적인 사안에 따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최초의 가능성이다.

 

[마지막 수정: 2009.09.29.]

 

 

Theme: Shocking Blue Green. Blog at WordPress.com.

Follow

Get every new post delivered to your In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