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빈번해지는 외국어 남용 현상을 소위 ‘언어적 순혈주의’의 입장에서 쉽사리 비판하기 이전에, 동 현상에서 엿보이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이란의 핵문제에 대한 다음 기사를 보자.
“미 정보당국은 영국, 프랑스의 카운터파트와 정보교환 등을 통해 올해 여름에는 이란의 새로운 시설이 내년 가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와 관련, 미국 외교가에서는 오바마 정부가 이란의 추가 핵시설 의혹을 공개함으로써 앞으로 이란과의 협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레버리지‘를 하나 잃게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 정부 입장에서는 이런 정보를 계속 공개하지 않은 채 이란과의 협상에 들어갔을 때 “너희들이 비평화적 핵개발 중단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다그쳐 이란를 수세로 몰아붙일 수 있는 유리한 카드가 소멸됐기 때문이다.”
(이상 2009/09/27 일자, 연합뉴스, 기사제목 <美 `이란 先手‘에 우라늄농축 정보 공개>에서 인용.)
국제정치면의 기사라서 외국어를 당연하다는 듯 사용한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는 중앙일보 연예-문화면 기사를 보자.
기사의 서두에 붙는 문구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에서부터, ‘결정권자’를 뜻하는 ‘디시전메이커’라는 외국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같은 기사의 본문을 보면
“눈물 코드로도 세 영화 중 뒤처지지 않는다. 평소의 마이너한 이미지 대신 대중영화를 택한 최강희나 오랜만에 스크린에 선 김영애의 조합도 무난하다.”
“영화는 ‘애자’란 제목처럼, 혹은 애자란 이름 그 자체처럼 적당히 ‘올드‘하다”
“패셔니스타 이미지가 강했던 최강희”
등의 대목들에서 계속 ‘일견 불필요해 보이는’ 외국어의 사용이 눈에 띈다. 붉은 글씨로 바꾸어 놓은 단어들은 분명 외국어 – 정확히는 영어의 음차표기 – 이지 이미 긴 기간 동안 고유어와 더불어 쓰여 언중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외래어(‘카드‘=패牌, ‘이미지‘=상像의 예가 그러하다)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던져본다. 위 필자들뿐만 아니라, 현재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 외국어를 무의식적으로 섞어 쓰고 있는 우리 모두가 글을 쓰고 단어를 선택하는 사고 과정 속에 있어 외국어의 사용은 과연 ‘불필요한’ 수준에서, 다시 말해 ‘더욱 적절하고 쉬운 단어를 바로 생각해낼 수 있었음에도’ 불필요하게 이루어 진 것에 불과할까? 과연 우리는 현재 우리말과 글로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가?
* * *
외국어의 남용 현상은 모국어가 지닌 언어적 생산력의 상실에서 비롯할 뿐 만 아니라 후자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1) 한국어로 스스로 생각하고 (2)그 스스로 생각한 것을 다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에게 적절하게 모국어로 표현하고 (3) 마지막으로 다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그 표현된 내용을 이해하는, 이상 세 단계로 이루어진 언어적 사고 및 의사소통의 모든 차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상황인데, 이를 어떻게 심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의 사고와 표현이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일반적 견해를 잠정적으로나마 대전제로 삼을 경우,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그 언어로 자신이 뜻하는 바를 다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으로 적절히 파악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는 세계와 마주한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감성을 통해서는 이미지로 지성을 통해서는 개념으로 만들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근본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종국에는 모국어로 사고할 수 밖에 없다. 외국어의 남용은 모국어를 통한 주체적인 생각에 문제를 야기한다.
서양정신사의 전통이 유럽의 일반인이 쓰는 언어와 긴밀히 맺고 있는 관계 혹은 유럽의 일반인이 서양정신사의 전통에 의외로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있다’라는 말과 ‘떠올리다’라는 말에서 ‘존재’와 ‘표상’에 대한 철학을, ‘옳다’라는 말에서 ‘법’과 ‘도덕’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켜온 배경을 볼 때 비로소 온전히 해명된다.
한국의 사상적 전통의 주류는 안타깝게도 이와는 다른 사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혹은 어쩌면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와 (현대보다 훨씬 더) 현격히 구별되었을 한문으로 사유되었기에 한국의 사상적 전통의 주된 흐름 속에서 민초들은 이론의 대상이었을지언정 그 주체가 되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서 유불선이 긴 세월을 거치며 일반의 풍속과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이나 무속적 전통이 반대로 전자에 미친 영향을 전적으로 도외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 무엇으로 불렸건 ‘민초’ 혹은 ‘백성’ 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자율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재 발굴하는 것이 한국어를 쓰고 그에서 더 깊은 사유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또 다른 과제임은 분명하다. 한편 한국 내부의 ‘언어적 장벽’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던 한문고전들이 현재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새롭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 역시 환영할 일이다. )
그리고 이렇게 언중(言衆) 전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만들고 사용하지 못했기에 현학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그리고 그 지식을 평가하는 과거제도를 통해 신분질서를 강화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던) 한국의 사상적 전통 조차도, 지난 세기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우리에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언문’이 한글로 재발견되기가 무섭게, ‘철학’이라는 단어를 위시한 일본식 개념들이 한국인의 사유체계를 다시 점거하면서, 심지어 우리는 우리가 ‘지혜를 찾는’, 즉 ‘철학하다’(φίλοσοφειν, philosophieren)라는 이론에 있어 근본적인 차원의 개념이자 그것이 표현하는 사태를 우리말로 스스로 ‘사유할’ 기회 조차 박탈당했다. 그 다른 예를 ‘존재’, ‘미학’ 등의 여타 개념 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혹자는 라틴어를 쓴 로마인들도 고전그리스어의 개념들을 번역하여 사용하였고, 이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 등도 라틴어의 개념들을 또다시 차용해서 썼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유럽어에서 쓰이는 개념들의 역사, 즉 그 개념사를 추적해보면 얼마나 긴 시간을 거쳐 많은 토론 속과 다양하게 제안된 번역어 간의 경쟁 속에서 현재의 개념어들이 살아남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한 예로 17세기에 살았던 근대 독일의 사상가 체젠Phillipp von Zesen은 수동적 열정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시오passio의 번역어로 라이덴샤프트Leidenschaft라는 신조어를, 순간을 뜻하는 모멘트moment에 대해서는 ‘눈깜짝할 사이’Augenblick를, ‘앞으로 던진 것’을 의미하는 프로이엑툼proiectum에 대해서는 ‘기획’Entwurf 등의 역어를 성공적으로 제안하지만, 그가 종교Religion의 번역어로 제안한 신성함Gottestum이나 식물학자Botaniker에 상응할 ‘풀을 묘사하는 이’Krautbeschreiber 등은 실제로 쓰이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전통적 학문과 기술 및 과학의 영역 만이 아니라 대중매체와 대중의 생활 언어 속에서, 추상적일 수 있는 ‘개념’보다 더욱 삶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할 ‘이미지’에 대한 적절한 표현조차도 모국어로 생각해내지 못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를 그저 ‘쿨’하고나 ‘쉬크’하거나 ‘올드’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언어는 세상의 단순한 반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이미지가 창조된다는 점(이 측면을 언어의 생산력이라고 표현했다)을 생각할 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우리는 앞으로 세계와 자신의 관계에 있어 점점 더 수동적이고 소비적인 모습을 띄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에서, (언어가 생산적일 때 비로소 가능한) 자율적인 학문이 성립되지 못하며, 그에 따라 학문이 일반의 삶에 호소력을 잃어 외면을 받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책을 읽지 않는 풍조와 깊이 없이 선정적인 매체로 말미암아 이러한 악순환은 가속화되는데, 그 가운데 삶과 세계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야 될 자리에 남이 다른 언어로 대신 고민했던 것과 심지어 그들의 결론까지 차용된다.
이러한 상황이 불러오는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의 생각이나 정보를 널리 공유할 의도를 갖고 있느냐와는 무관하게) 외국어의 남용 자체가 아직까지는 다수자인 일반 대중들에 대한 소수자(“마이너리티”)의 부당한 정보독점을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가 설령 “레버리지”(지렛대, 수단)나 “마이너” (소수의, 소수자적인)라는 단어를 이해한다고 할 경우에도, 그 역시 병원의 환자나 미술관 관람객의 입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 없이 ‘디아이시’(DIC, 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나 ‘멜랑콜리아 엑스 콜레라 니그라’(melancholia ex cholera nigra)라는 단어를 접할 경우 난색을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도 파악하지 못하며, 기껏 미술관을 찾고서도 뒤러의 판화에 담긴 서양정신사적 맥락을 이해할 기회를 빼앗긴다. [참고로 두 용어는 각각 '범발성 혈관내 응고증' 및 서양 4체액설의 용어인 '검은 담즙질에서 비롯하는 우울증'을 뜻한다.]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에 대한 정보가 소수의 지식 독점층 간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 형태로 전달될 경우 그야말로 자칭 결정권자들(“디시전메이커”) 만이 당면 문제에 대해 정보를 전유할 뿐 아니라 그에 관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 *
이렇게 볼 때, 외국어 남용의 문제는 특정 표준어기관이나 언어순혈주의자, 혹은 언어단체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전문영역에서는 전문인이자 다른 영역에서는 대중 일반에 속하는) 모두의 문제이다. 즉, 학술적 번역의 영역에서뿐 만이 아니라[고전그리스어의 파스헤인πάσχειν, 라틴어의 파티pati, 독일어의 라이덴leiden을 최근 우리말의 '겪기' 및 '겪음'으로 옮긴 최근 한 고전학자의 시도는 이러한 점에서 특히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소위 ‘기술번역’으로 불리는 상업적 번역(컴퓨터 운영체제 및 프로그램의 명령어들의 번역도 이에 해당한다), 외국의 새로운 기사를 소개하는 언론 및 일반 블로그 사용자의 글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외국어 남용의 이면에는 외국어가 지시하는 현상을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전문적 역량의 결여, 혹은 나태함이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문제를 가속화시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대중들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 대안을 다양하고도 개별적인 사안에 따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최초의 가능성이다.
[마지막 수정: 2009.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