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a dream

May 2, 2009

Images from the Theologisches Konvikt, Berlin

Filed under: 사진(Photography) — yheejean @ 11:59 am


Images from the Theologisches Konvikt, Berlin

May 1, 2009

Leidenschaft und Affekt bei Kant

Filed under: Ästhetik — yheejean @ 10:52 am

Leidenschaft und Affekt bei Kant

Jean Yhee

 

Kant schreibt in seiner dritten Kritik über den Unterschied zwischen Leidenschaften und Affekten folgendermaßen:

“Affecten sind von Leidenschaften specifisch unterschieden. Jene beziehen sich bloß auf das Gefühl; diese gehören dem Begehrungsvermögen an, und sind Neigungen, welche alle Bestimmbarkeit der Willkür durch Grundsätze erschweren oder unmöglich machen. Jene sind stürmisch und unvorsätzlich, diese anhaltend und überlegt: so ist der Unwille als Zorn ein Affect; aber als Haß (Rachgier) eine Leidenschaft. Die letztere kann niemals und in keinem Verhältnis erhaben genannt werden; weil im Affect die Freiheit des Gemüths zwar gehemmt, in der Leidenschaft aber aufgehoben wird.” (KdU, 1905 Bd.5, 272)

Hier hat Kant die Bestimmbarkeit der Affekten und der Leidenschaften, die übrigens in meiner These doch von vorne an nicht wie bei Kant so stark unterschieden werden, als fast unbestimmbar definiert. Aber war die Bestimmbarkeit oder die Veränderlichkeit eigentlich, ganz im Gegenteil, nicht die Eigenschaft, oder sogar die Definition der Affekten und der Leidenschaft selbst? Dem scheinbar beharrlichen Zustand der Leidenschaften muss man seine dynamische Natur auch ablesen können. Diese scheinbar widersprüchliche Doppelnatur der Affekten (und der Leidenschaften), nämlich die mysteriöse Symbiose der Beharrlichkeit und der Veränderlichkeit, bietet uns eine interessante Perspektive an, womit wir die menschliche Natur besser verstehen können.

Kant seinerseits versucht weiter, das ästhetische Moment bei dem Erhabenen zu retten, in dem er behauptet, dass auf einem vorbestimmten Zustand der Affekten, nämlich einen zwar gehemmten aber noch relativ freien Gemüts zu erkennen sei.

Mir scheint sein Versuch ja ein rein theoretisches Wagnis zu sein, wobei man versucht, nicht eine passende Antwort zur gegebenen Frage, sondern eine passende Frage für die Antwort zu finden. In anderem Wort, versucht man mit Kants These, die menschliche Bedingung zu einem ästhetischen Erkenntnis nicht aus dem realen Leben zu finden, sondern jene Bedingung ohne zureichende empirische Grundlage vorzubestimmen und das jener Bestimmung passenden Image eines ästhetischen Erkenntnis als die Antwort vorzubereiten.

Wichtig ist doch eine empirische und dynamische Betrachtung über das Zusammenspiel der geistigen und körperlichen Modi der Menschen auszuführen. Denn nicht nur die Affekten (und die Leidenschaften), sondern der ästhetische Zustand selbst liegt unter dem Einfluss von der (inneren und äußerlich) ‚Natur’ (im spinozistischen Sinne) und ändert sich ständig. Die permanente (Ver)änderung ist der Kern, auf den ich in meiner These mittels eines Begriffes ‚Leiden’(pati) eingeht. Die permanente Änderung ist nichts anders als die Modi, oder die Art und Weise der Existenz, die Modifizierung des Seins.

Nun zurück zum Kant. In diesem Kontext lässt sich verstehen, warum Kant an mehren Stellen eine überraschend traditionale Stellungsnahme zu dem Verhältnis der Vernunft zu den Affekten zeigt. Z.B. schreibt Kant,

“Und wenn der Affect ein Rausch ist, die Leidenschaft eine Krankheit sei, welche alle Arzeneimittel verabscheut und daher weit schlimmer ist, als alle jene vorübergehende Gemüthsbewegungen”(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1907 Bd.7, 265f)

Oder, “Affecten und Leidenschaften unterworfen zu sein, ist wohl immer Krankheit des Gemüths; weil beides die Herrschaft der Vernunft ausschließt.”(ebenda, 251)

Eine solche Meinung, die Überlegenheit der Vernunft zu den Affekten, wird weiter in der dritten Kritik weiter zu vertreten, in einer neuen Konstellation, weil es nun auf die Hierarchie zwischen dem guten Geschmack und dem Genie ankommt.

Kant setzt damit eine starke Trennung zwischen der Vernunft und dem anderen Bereich vor, den z.B. Baumgarten ‚die untere Erkenntnis’ genannt hat, und somit wird das Zusammenspiel zwischen Körper, das z.B. bei Spinzoa sich als ‚Affekten’ oder ‚imaginatio‘ ergeben, nicht mehr als die unerlässliche Komponente des ästhetischen Urteils anerkannt. Obwohl “Kant in seiner Anthropologie die Absolutheitsanspruch der Vernunft gegen den Absolutheitsanspruch der Vernunft in Schutz nimmt”(Art. Passion/Leidenschaft, Dieter Kliche, s.712, Bd.4, Ästhetische Grundbegriffe), führt seine Bestimmung über die Unbestimmbarkeit der Leidenschaften folgenreich “zur Trennung der Verbindung von Leib und Gefühl”(ebenda, bemerkenswert ist da angeführte Position Diltheys über die absolut geistige Natur des Ästhetische).

 

- Jean Yhee

Letzte Korrektur am 2009.05.1

이스라엘, 논쟁 속의 계몽주의 Enlightenment Contested, 서문

Filed under: 이스라엘, Enlightenment Contested — yheejean @ 9:43 am

(아래의 번역은 계속 수정되고 있으므로 다른 곳으로의 인용이나 복사는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번역에 대한 좋은 지적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 이진)

 

이스라엘, <논쟁 속의 계몽주의 Enlightenment Contested>, 서문

 

계몽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 사회적 현상과 지적 현상 중 어느 쪽에 해당하였는가? 논의의 여지가 있겠으나, 만일 우리가 이 근본적인 주제에 적절하게 또 균형을 갖고 접근한다면, 계몽주의는 그 두 가지 모두였으며 물리적 실재와 정신적 삶이 말하자면 변증법적 혹은 양방향적으로 진정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 답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계몽주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정말 중요하기는 한가? 물론 분명 그러하다. 왜냐하면, (비단 그들 만은 아니었지만)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계몽주의를 편견에 차 있고 깊이가 없으며 자기 기만적이며 과도하게 낙관주의적일 뿐 아니라 유럽중심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종국에는 파괴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근간 유행해왔었다고는 해도,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들을 부인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오히려 계몽주의는 이성과 조화된 삶을 소망하는 사람라면 응당 지지하고 기여하려 할 이 시대의 현실 및 저 ‘근대성’의 실마리들[strands of 'modernity']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긍정적 요인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고 주장해야 할 확고한 – 보다 정확히는 시급하다고까지 할 – 필요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유럽 및 대서양 양안을 걸쳐 펼쳐진 전면적 사태로서의 계몽주의에 대한 광범위하면서도 일반적인 평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여전히 계몽주의는 과연 무엇이었으며 실제로 그것이 지[성사]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무엇에 관여하고 있었는가와 관련해 여전히 상당한 불확실성, 의구심 그리고 불분명함이 남아있다는 점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논쟁 중의 대부분에 있어 계몽주의에 우호적이건 비우호적이건 간에 논자 모두는 최근 수십여 년 동안 매우 부적합하게 이해되고 기술되어왔던 역사적 현상에 대해 다투었을 뿐이다. 실제로 피터 게이(Peter Gay)의 야심에 찬 연구가 2부작 <계몽주의: 그 해석 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으로 1966년에 출간된 이후로는 지금까지, 게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계몽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제공하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없었다. 특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계몽주의의]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였던 1750년 이전 시기에 대한 납득할 수준으로 상세한 일반적 설명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 18세기를 연구하는 대개의 역사학자들 간에는 철학자 및 정치 사상 전문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계몽주의의 지적[이론적intellectual] 내용에 대한 토론이 – 현재 최신의 역사편찬론(historiography)에 따르자면 –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적/물질적 요인들에 대해서와는 반대로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 저술의 목적은 사용 가능한 개괄적인 조사연구 및 참고 작업을 제공함으로써 일반 독자뿐 아니라 학생 및 전문적 학자로 하여금 계몽주의의 이념들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게 하고, 그와 함께 역사가에게 있어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물질적 요인이 지적 충격[impulse]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전자의 논리를 [단순히] 거꾸로 뒤집어서 이념이 사회적 경과[process]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식으로 [무리하게] 주장하지 않으면서, 밝혀내는 데 있다. 오히려 나의 목표는 참된 균형을 달성하는 것, 즉 어떻게 이념들과 사회-정치적 맥락이 상호 작용하는지를 보이는데 있는데, 특히 이 때 물리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상호작용은 근래의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선호와는 반대로 지적 측면으로부터 접근되게 된다. 이러한 역() 강조의 이유는 내가 보기에 지적 차원이 상기 방정식에서 훨씬 덜 이해되고 있는 변에 해당하며 따라서 현시점에서 사회/문화적 측면 보다 훨씬 더 재검토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근년간 계몽주의에 대해 제기된 가장 큰 논쟁적 질문의 하나는 계몽주의가 혁명의 탄생[making]에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것인데, 이 질문은 더욱 일반적으로 보자면 또 다시 계몽주의가 ‘근대성’과 맺고 있는 관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후술하는 주장이] 아무리 오늘날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서적들과 팜플렛들, 설교들 그리고 신문들 속에서 ‘철학’이 인간사에 있어 ‘전반적[보편적 universal] 혁명’을 촉발시켰으며 또 당대에도 촉발시키고 있다고 흔히 주장되었다. 1789년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을 특히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 맺으면서 그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광대한 격변상이 ‘철학의 실현’(원주1. McMahon, Enemies of the Enlightenment, 56)이라고 보는 것이 흔해졌다. 그러나 ‘철학’을 근대의 ‘혁명’과 한 괄호 안에 묶는 것은19세기 전반 그리고 심지어 그보다도 이른 시기에 있어서도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1789년 앞뒤의 수십 년간에 걸쳐 모든 종류의 또 다른 ‘혁명들’이 프랑스의 그것 외에도 존재했었음을 특별히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모든 혁명들이 폭력적이었거나 정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두는,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었을뿐더러 많은 이들을 심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철학자들과 철학에서 비롯된 충격과 매우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1789년 이후 얼마간 동안은, 프랑스 대혁명과 이로부터 파생된 유럽 전역 및 아메리카 각지에서의 대격변들 – 여기에는 1820년대 전까지 그리스 및 스페인 지배하의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대규모 혁명들이 포함된다 – 을 ‘철학’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전 세기에 ‘철학적 정신’ (l’esprit philosophique) 또는 종종 ‘철학사상’ (philosophisme)이 야기한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보편적인’ 혁명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 중] 철학적 정신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프랑스의 혁명적 정치가 쟝-에띠엔느-마리 포타이 (Jean-Étienne-Marie Portalis)가 1798년 지적한 바와 같이, 실제로 철학 일반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철학자들, 즉 철저한 경험주의를 받아들이고 오직 ‘실험과 관찰’의 권위만을 인정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독일 이상주의[관념론]에 헌신했던 이들은 철학의 시야를 좁히는 방식으로 어떻게 이성을 종교적 믿음과 조화시킬 수 있을지에 한참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철학적 정신은 ‘비교학 [지오바니 비코와 ‚une science comparée'에 대한 논문 링크 참고 – 역주] 의 결실’로서 등장한 점은 같지만 바로 [종교 등의] 특정한 현실 측면을 의식해 철학적 시야를 제한하길 거부하는 점에서, 또한 우리의 현실 전부를 끌어안을 뿐 아니라 그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주체할 수 없는 열망이 있었다는 점을 통해 [그 차별적 특성이] 정의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견 소수에 해당했던 혁명적 계몽주의자들은], 혁명적인 ‚철학적 정신’이, 포타이가 그렇게 표현했듯, [예외없이]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원주2. Portalis, De l’usage et de l’abus, i. 114-15). 무엇보다도, [이 특별하고도 새로운] ‚철학 사상’은 다른 철학들과는 달리 ‚보편적 정신의 한 종류’(‚une sorte d’esprit universel’)였다.

 

‚혁명’을 ‚보편적 정신’에 귀속시키는 사례가 [대혁명이 발발한] 1789년 이후[더욱] 빈번했다고는 해도, 새로운 형태의 위험한 사상이 종교와 사회이론 및 정치를 전염시켜 그 결과 구체제[앙시앙 레짐]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권위와 전통, 신앙과 특권을 위협하고 있음에 불만을 토로하는 1789년 이전의 많은 사례들이 이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현대 역사학자나 학생들은 이러한 것들을 당시 시대의 집단적 상상의 소산으로 쉬이 치부하곤 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이 환상은 역사적 실재와 거의 무관한 이데올로기적 강박관념과 선입견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것이다. 근 수십여 년간 유럽 및 아메리카 모두의 역사학자 사이에 ‚근대성’의 문턱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일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이념들에서 찾는 것은 갈수록 유행에 뒤떨어진 방식이 되었다. 맑스주의적 교조[도그마]에서 경제적 현실 및 문화 상부구조를 강조한 것이 거의 보편적[으로 굳어진 듯한 방법론적] 확신을 가져왔다.

 

(계속)

[마지막 수정: 200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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